시애틀이 가야금을 만났더니
‘농현의 예술’로 거듭 나더라
장명자
명인에게 가야금은 분신이다.
화려한 한국에서의 활동을 접고 미국 이민의 삶 속에서도 가야금을 떠날 수는 없었고, 결국 ‘예술의 도시’ 시애틀에서 가야금 사랑이 꽃을 피우게
됐다.
시애틀이 진정한 가야금을 만나 ‘농현(弄絃)의 예술’로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이다.
권다향 명창이 이끄는 국악한마당에 최근 합류하면서5,000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국악 알리기에 나선 장명자 명인. 그녀와 가야금은
강산이 다섯 번이나 변했을 무구한 세월인 반세기를 함께 했다.
장 명인은 “가야금은 해가
지고 난 뒤 비 내리는 촉촉한 시애틀 저녁 날씨에 가장 어울리는 선율이라는 생각이 든다”며 시애틀과 가야금이
‘찰떡 궁합’임을 강조했다.
5살 무렵부터 라디오 국악에 흠뻑 빠져
전남
광양 출신인 장 명인이 굳이 국악과 인연을 맺은 시기를 따지자면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인 5살 무렵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라디오에서 국악이 흘러나오면 어머니한테 달려가 치맛자락을 붙잡고 노래가 다 끝날 때까지 놓지를 못했습니다. 국악 가락에 푹 빠진 것이죠.”
아버지
사업 때문에 서울로 이사를 하게 된 그녀의 부모는 국악에 넋이 나가는 딸의 특이한 행동(?)을 알아채고 국악예술중학교에 입학을 시키게 된다.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가야금 공부에 나섰고 인간문화재인 정권진, 성금련, 박귀희의 사를 받게 된다.
한국
전통 국악 현악기 가운데 대표 주자라 할 수 있는 가야금은 가야의 우륵이 만들었다고 전해 내려온다. 오동나무로 만든 판
위에 명주실을 꼬아 만든 줄을 기러기 발 모양의 안족(雁足)에 얹어 놓고 손가락으로
뜯거나 튕겨서 소리를 낸다.
다소 거친 음색의 거문고가 남성의 소리라면 가야금은 음색이 맑고 가냘프며 아름다운
여성적인 소리로 통한다. 대표적인 국악 현악기인 가야금은 전통음악과 민속음악, 창작음악에 이르기까지 가장 많이 분야에서 연주가 이뤄진다.
청와대 국빈방문행사나 외국공연 다니며 두각
어려서부터
가냘프고 서글픈 가야금 소리에 빠져 있던 장 명인은 선천적인 재능과 후천적인 노력의 결과로 중학교 3학년부터는
성금련 명인의 가야금 조교로 활동하게 된다.
성금련 선생을 따라 모 재벌그룹 회장 부인과 딸의 레슨을 위해
정릉으로 출장을 다니는 귀한 몸이 되기도 했었다.
국악예술고 시절에는 청와대 초청으로 국빈 방문 행사에 참석, 한국 알리기에 앞장서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이후
서라벌예대 국악과에 진학한 그녀의 실력은 하루가 다르게 급상승했고 가야금 산조(연주)와 병창(노래)을 곁들인 그녀의 실력은 국악계의 ‘무서운 아이’로 등극하게 하기에 이른다.
유명세를
탄 덕분에 대학 졸업과 동시에 서울국립관현악단1기생으로 입단하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패티 김이 불러 유명한 ‘별당아씨’ 전주곡 연주와 한하운 시인의 다큐멘터리 물소리 효과음 녹음에도 동참했을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았다.
당시만
해도 외국에 나가는 것은 그야말로 꿈같은 이야기였지만 가야금 덕분에 태국∙홍콩∙필리핀∙일본∙베트남 공연으로 같은 또래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장
명인은 “현재까지도 가장 기억에 남아 있는 외국 공연은 바로 태국 왕실 공연이다”고 서슴없이 말한다.
공연 후 태국 왕실이 선물로 준 목걸이는 지금도 가지고 있다.
1983년 가족과 함께 태평양 건너 이민
장
명인은 화려했던 한국 생활을 접고1983년 가족과 함께 태평양을 건너 LA에 도착한다.
그녀 역시 여느 이민자와 마찬가지로 모든 게 낯설었지만 타고난 성실성을 바탕으로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이를 악물고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지성이면 감천’ 이라고 상당한 규모의 옷가게를 인수하는 저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사업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생활이었지만 가야금 사랑은 오히려 깊어만 갔다고 한다.
장 명인은 “주변에 입소문이
퍼지면서 가야금을 배우겠다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늘어났는데 그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며 “일상의 밀려오는 피곤함도 문하생들의 열정을 식히기에는 역부족이어서 최선을 다해 가르쳤다”고
회고했다.
그녀는 “지금
생각하면 그때 어떻게 레슨을 했는지 모르겠어요. 그만둘까도 생각해봤지만 하루가 다르게 늘어만 가는
문하생들의 실력에 보람을 느꼈다”고 말했다.
'제1회 사랑방 잔치' 통해 시애틀 데뷔
이후
시애틀로 주거지를 옮긴 장 명인이 시애틀 한인사회에 데뷔를 한 것은 2년 전인 2011년 11월 페더럴웨이 한인회관에서 열린 ‘제1회 사랑방 잔치’에서 였다.
부드러우면서도
감미로운 선율에 많은 동포들이 박수를 보내면서 지난해에는 한미자유무역협정(FTA) 발효를 기념하는 공연에 출연하게 되면서 미 주류사회에도
얼굴을 알리게 됐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장 명인은 국악선교에도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다. 그녀는 “종교의 경건한 의식에 국악의 중후함과 부드러움이 조화를
이뤄 종파를 불문하고 접목을 시키고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종교계 최초로 천주교 미사에 국악창법이
선을 보여 현재도 그대로 진행되고 있으며 많은 신자들의 호응을 얻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장
명인은 “종파를 불문하고 국악선교에 관심이 있는 종교가 있으면 기꺼이 동참할
뜻이 있다”고 말했다.
여생 ‘국악 전도사’로 살아갈 계획
가야금
연주를 통해 갱년기 우울증을 극복했다는 장 명인은 지인의 소개로 권다향 명창과 해후하는 기쁨을 맛보았다. 국악의 불모지인
시애틀지역에 국악 전파에 힘을 합치자는 권 명창의 권유를 흔쾌히 수락했다.
지난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발효 축하 공연에서 권다향의 장고, 김지우의 대금과 함께 첫 선을 보인
기악 합주는 ‘서북미 국악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국악한마당을
이끌고 있는 권다향 명창은 “한국에서도 익히 알려진 장 명인의 훌륭한 가야금 연주와 장고 및 대금이 어우러진 환상의 소리가 국악 오케스트라는 표현을
해도 부족함이 없었다”고 자랑했다.
장
명인의 가야금 연주를 듣고 배울 곳이 없어 아쉬움을 가졌던 한인 국악 마니아들의 요청으로 그녀가 지도하는
가야금 교실이 매주 페더럴웨이에서 열리고 있다.
치과의사인
딸 홍승연(에버렛 치과), 사위 박용국(페더럴웨이 치과)씨와 사이에 태어난 3명의 손자 손녀와 벨뷰에 살고 있는 그녀는 “환자 진료로 바쁘지만 싫은 내색도 없이 페더럴웨이까지 태워주는 사위가 아들 역할을 톡톡히 해주고 있다”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든든한 후원자를 자처하는 딸 부부가 그저 고마울 뿐이다. 어느새 다 자라 친구가 된 딸 내외와 이따금 마주앉아 와인 한잔을 나누는 순간, 가장 큰 행복을 느낀단다.
“더 이상 무엇을 바라랴, 이미 잔이 넘치는 것을…”
시애틀N=김성배 편집위원 sbkim@seattle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