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진(에버렛 거주)
산과
교회
-부활절을
기념하며-
머리로만
갔었던 산을 건강한 남편을 따라 서서히 다니기 시작했다. 더러 가까운 곳에 있는 산을 올랐을 때는 그냥
올라갔다 내려오는 곳이 산이었는데, 요즘 내가 느끼는 산은 좀 남다르다.
자연이
이렇게까지 아름다웠던가? 자연이 주는 이 맑음이 이렇게까지 청정했던가?
그렇다. 이 웅장하고 고결하기까지 한 산을 오를 때도, 겸손한
마음으로 발을 떼어야 하고, 심령이 갈급하여 주일이 되면 찾는 교회도 겸손한 마음으로 들어서야 한다.
교만이
들어가기 시작하면 사고가 생기는 곳이, 산이고 또한 교회다. 매주
가는 산행, 매주 가는 교회. 그런데 왜 유독 교회에서 더
다치는 사람이 많은가.
산행에는 군림의 욕심에 차 있는 지도자가 없고 다만 산악대장의 주의사항을 듣고, 묵묵히 따라가면 되기 때문에 다치는 사람이 더 적은 것이다. 산행을
마치면 뻐근한 다리를 느끼면서도, 땀을 흘리며 목적지에 도달하고 왔다는 그 만족감과 감사함을 서로에게
주고받는다.
그런데
낮은 데로 임하신 예수님을 공부하면서도, 왜 지도자들은 군림에 임하려 하는가? 협력해 선을 이루라 하면서 왜 협력에는 고집만 부리는지?
14년
전 정원을 잘 가꾸면 좋을 마당이 있는 작고 오래된 집을 은혜 가운데 구입할 수가 있었다. 남편과 기도
끝에 방 하나를 모든 선교사를 위한 방으로 만들었다. 재정이 넉넉치 못한 교회 선교사나 또 교회 손님을
위해 잠자리를 마련해 드리고자 했다.
그 시간에 참 여러분의 지도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또 좋은 말씀도 들을 수 있는 기회도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진심으로
존경하고 싶어 지는 지도자분들도 계신다. 또한 지금은 가만히 앉아서 만나고 싶은 목사님의 말씀도 골라
들을 수 있는 ‘말씀의 홍수’속에 산다.
그런데
우리는 왜 매주 교회에 나가는 것일까? 복에 겨운 축복이 너무나 감사해서, 그 감사가 홀연히 사라질까 두려워서, 가슴 아픈 사건, 서러웠던 일, 좋아하는 집사 권사가 보고 싶어서, 아님 좀더 거룩해지고 싶어서, 어찌됐든 매주 간다.
가끔은 더 새로워질 것을 다짐하며 경건한 교회문을 연다. 불안한
세상에, 알 수 없는 내일에 우리는 더 평안해지고 싶어 교회 문을 들어서기도 한다. 진정 그 평안을 가슴으로 전해주는 지도자를 그리워하면서, 원하면서….
우리
모두는 완벽하지 않다. 완벽해질 수도 없다. 하지만 노력하는
게 보이기만 해도 우리를 미쁘게 봐주시는 분이 계시기에 우리는 또 행복해질 수 있는 거다.
내가
즐겨 낭독하는 글이 있다. “나는 나의 그리스도에 있어서 하늘에 있는 자요, 내 육체로써 땅에 머무는 자이다.”
우리는
다 머물고 있는 거다. 머물고 있는 동안 힘껏 응원해야 하고 감동받고,
감동을 주는 서로가 되어야 한다. 머무는 동안 우린 더 귀중한 것을 보고 소중한 것을 찾아야
한다.
우찌무라
간조의 저서에 이런 구절이 있다. 어떤 사람과 마호메트와의 대화다.
문: 무엇이 유이며, 무엇이 무입니까?
답: 신이다. 세상이다.
문: 누가 사람이며 누가 짐승보다 못합니까?
답: 신자이다. 거짓 신자이다.
문: 무엇이 가장 추하며, 무엇이 가장 아름답습니까?
답: 신자의 뒷걸음질이다. 죄인의 회개이다.
부활절을
맞으며 모두가 쏟아지는 평안 속에서 지내시기를 감히 소원해본다.
‘산은
말을 하면 귀를 막고 침묵하면 귀를 여네’ 김영호 시인의 ‘산
눈5’ 시작은 나를 또 산으로 부른다.
해피 이스터(Happy Eas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