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돈하 목사(오리건 벧엘장로교회 담임)
종려주일의 묵상
종려주일은 부활절 전 주일이며 또한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주간의 첫날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마지막 주간 예루살렘성으로 입성하실 때 군중들이 뛰어 나와 종려나무 잎을 흔들며 호산나를 외치며 환영한 사실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호산나”란 히브리어 ‘호시안나’에서 유래했는데 그 뜻은 “이제 우리를 구원하소서”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로마의 식민지로서 온갖 탄압과 핍박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영적으로는 종교 지도자들의 위선에 깊이 실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지킬 수도 없는 맹목적인 율법주의를 강요당했기에 영생의 길은 묘연했고 참을 수 없는 영적 기갈을 느꼈습니다. 게다가 로마의 가혹한 식민통치로 민족의 자존심마저 짓밟히게 되었고 무거운 세금에 숨을 쉴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와 같은 암울한 시대 상황은 이민족의 압제로 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보내주신다고 예언된 “메시야”를 대망하는 시대분위기를 형성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3년의 공생애 기간 동안 보여주신 기적들은 이 분이야 말로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한 메시야가 확실하다는 부푼 꿈을 갖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불치의 병을 고치고 귀신 들린 자를 쫒아내셨으며 오병이어로 수천명을 먹이셨습니다.
극기야 죽은 나사로까지 살리셨을 때 예수님의 인기는 극에 달했습니다. 이즈음 군중들은 예수님이 로마로부터 자신들을 해방시켜 줄 정치적인 메시야가 확신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기대가 컸던 만큼이나 예수님께서 저항하지 않고 로마군에게 넘겨지는 모습은 큰 실망과 좌절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들은 순식간에 폭도들로 변했습니다. 며칠 전까지 호산나를 외치며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던 축복의 손은 예수님을 향해 돌을 던지는 저주의 손으로 변했습니다.
군중들은 예수님이 메시야가 아니라는 확신 속에 실망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한 사실은 예수님은 메시야였다는 것입니다.
다만 예수님은 그들의 착각처럼 정치적인 메시야가 아니었을 뿐입니다. 그 분은 육적 차원을 넘어 영적 차원까지 통치하는 기름 부음을 받은 만왕의 왕으로서 진정한 메시야였습니다.
군중은 자신의 문제를 정치적 억압으로 보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보다 궁극적이고 본질적인 문제가 죄인 것을 정확히 꿰뚫어 보셨습니다.
그랬기에 그 분은 죄가 뿜어내는 사망을 삼키기 위해 자신의 몸을 아낌없이 십자가에 던져 죽으시고 부활하여 믿는 이들의 구세주가 되신 것입니다.
우리는 종려주일을 생각하며 예수님을 환영한 군중들이 어떻게 한 순간에 폭도들로 변했는지 놀라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 안에도 군중들 안에 스며있는 죄성이 존재하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들의 이익에 눈이 먼 그들은 예수님을 정치적인 메시야로 바라본 결과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그 분을 십자가에 목 박았습니다.
혹시 내 안에도 그들과 같은 탐욕은 없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을 때 우리는 예수님을 나의 방식대로 바라본 결과 그 분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서의 메시야가 아닌 나의 욕심을 성취하기 위한 도구로서의 메시야로 전락시킬 수 있습니다.
고난의 주간을 시작하는 종려주일 아침 과연 나의 마음의 보좌에는 누가 앉아 있는지 다시 한번 확인합시다.
그 위에 앉은 분은 진정한 왕이신 예수님이신가? 아니면 탐욕적인 내 자아인가? 고난주간 철저한 회개를 통해 예수님의 보혈에 씻김 받은 깨끗한 몸과 마음으로 영광스런 부활의 아침을 맞게 되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