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수(컬럼비아대 로스쿨)
코리안에서
코스모폴리탄으로
나는
두 세계에서 살았다.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미국이라는 나라에 던져졌다. 언어의 장벽과 낯선 문화는 나에게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가장 시급한 문제는 영어를
배우는 일이었다. 돈을 들이지 않고 영어 실력을 늘리는 방법은 독서뿐이었고, 나는 큰 글씨로 되어 있는 그림책부터 시작했다.
학교에서 한마디 말도
없이 돌아오는 날들은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지만, 영어 실력은 서서히 늘었고 미국에 온지 6 년이 지났을 때 프린스턴 대학교에 합격했다는 놀라운 소식을 받았다.
대학에는
또 다른 도전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똑같은 자격으로 입학했지만18년 동안 미국에서 살아온 학생들과 경쟁하기는 쉽지 않았다.
세계 곳곳에서 모인 뛰어난
학생들과 공부하는 것이 처음에는 막막하게 느껴졌지만, 나만의 방식으로 차근차근 걸어간 결과 우등으로
졸업할 수 있었다. 현재 컬럼비아 로스쿨에 학비 전액 장학금을 받고 합격한 상태이며 가을 학기에 진학할
예정이다.
어찌
보면 나는 한국에서 태어났으나 성인이 되기 전에 미국에 온 1.5세로서 완벽에 가까운 이력을 가지고
있다.
미국에
처음 왔을 때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학교에 입학하게 되었고 장학금까지 받게 되어 형편이 넉넉하지 않은 부모님의 부담을 덜어드릴 수 있었다.
하지만 미국 생활을 통해 깨달은 것은 나는 온전한 미국인은 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미국에서 10년이 넘는 시간을 보냈지만, 영어가 한국어보다 월등히 편하지도 않으며, 여전히 한국인의 정서와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그러하다.
미국에서 소위 명문대를 나왔지만, 그 시간이 나를 미국인으로 바꿔 놓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를 완전한
한국인이라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가치관이 확립되고 어른으로 성장하는 청소년기를 전부 미국에서 보냈기
때문이다.
때로는
어느 한 곳에 완벽히 소속되지 못하는 것이 고통스럽기도 했다. 뜬구름 같은 어중간한
지점에서 벗어나 어딘가에 안착하고 싶었다. 나와 비슷한 나이에 미국에 왔지만 완전한 미국 사람 같은
친구들을 보며 자괴감을 느끼기도 했다. 왜 나는 그들처럼
한국인에서 미국인으로 탈바꿈할 수 없는 것일까.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내가 한국인도, 미국인도 아닌 것, 그리고 영어와 한국어를
똑같이 구사할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하다. 언어는 문화로 직결되기에 나는 미국에
살면서도 한국 문화를 잊어버리지 않을 수 있었다.
영어를 잘 구사하지 못하는 부모님과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는 것에도 전혀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영어 실력이 향상될수록 한국어 실력도 같이 향상되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지킨 한국어, 그리고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이 세상을 두 개의 시각으로 볼 수 있게 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시각을 통해 내가 아는 세상은 아주 작은 조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교포', ‘이민자’, ‘코리안 아메리칸’ 같은 단어들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사람은 이러한 단어들이 의미하는 정형화된 정체성에
입각할수록 편협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내 정체성을 ‘코리안 아메리칸’으로 제한하고 싶지 않다.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욱 촘촘하게 연결된 세상에 사는 우리는 ‘코리안', 혹은 ‘코리안 아메리칸’에서 멈추지 말아야 한다.
한국 사회 및 미국 사회뿐만 아니라 더 큰 세상을
우리의 무대로 삼아야 한다. 다시 말해, 코스모폴리탄, 즉 세계인이 되어서 넓은 시야를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
한국과 미국에
모두 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은 엄청난 혜택이며 자산이다. 각 문화의 장점은 살리고 단점은 버릴 수 있는
유연성, 나와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포용력, 그리고 타지
생활을 통해 단련된 정신력과 적응력은 쉽게 기를 수 없으며 세상을 사는 데 큰 도움이 되는 능력들이라고 볼 수 있다.
나는 두 세계에서 살았다. 그 경험은 때로는 힘들고 막막했지만, 세상을 보는 시야를 넓혀주었고 사회에 기여하고 싶은 마음을 가지도록 이끌어 주었다.
어쩌면 이것은 내가 누린 특권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일 것이다. 세계인으로 해야 할 역할을 다하는 것, 바로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코리안 아메리칸의 과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