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미숙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 지부 회원)
겨울이
필요해
“물망초
꽃씨를 살 거야.”
“또?”
딸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더니 킥킥 웃었다. 하긴 나와 물망초의 씨름은 벌써 2년 전에 시작되었다.
가족과 함께 빅토리아 섬에 있는 정원에 갔을
때였다. 딸 아이는 그 많은 화려한 꽃들을 마다하고 가장 앙증맞은 꽃에 넋을 잃었다. 파란 꽃잎 안쪽에 노란 동그라미를 그려 넣은 잔잔한 꽃송이들이 눈웃음을 쳤다.
나를 잊지 마세요, 꽃말이 떠오른 순간 얼른 물망초 꽃씨 한 봉지를 집었다.
기다리던
봄이 왔다. 마당 한구석에 물망초 씨앗을 심어놓았다. 여러
날이 지난 뒤 깻잎 모종을 심을 곳을 찾다가 자잘하게 올라오는 여린 새싹을 보았다. 웬 잡초가 이리
극성스레 올라오나 하고 다 뽑아내고 그 위에 깻잎 모종을 심었다.
전화 통화를 하다가 “물망초 잘 있나요?” 하고 딸이 물었을 때, 잠시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물망초 싹을 내 손으로 다 뽑아 잡초 더미 위에 던져버렸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식물
정보를 알려주는 앱에서 물망초는 가을에 파종하는 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때를 놓친 것이 아니었다. 가을에 다시 파종했다. 이번엔 따스하게 잘 자라라고 큰 화분에 좋은
흙을 사다 담고 집 안에 보관했다. 마르지 않게 물도 자주 주었다. 구월에
작은 싹이 올라오더니 시월쯤엔 손가락만한 잎들로 자라났다.
꽃을 보게 되리라는 희망으로 마음이 들떴다. 잎들은 커지는데 좀처럼 꽃대가 올라오지 않았다. 마침내 두어 개의
꽃대가 올라오기 시작할 때 이상하게도 기운이 쇠한 듯 보였다. 모든 조건을 다 갖추어 주었는데도 어느
날부터인가 잎이 누렇게 변해가고 있었다. 너무 들여다보아서 질려버린 것일까?
다음
해 이른 봄에 다시 씨앗을 뿌렸지만, 여름이 다 지나가도록 꽃을 볼 수 없었다. 가을이 되어서야 가는 꽃대가 휘청거리며 몇 개 올라왔지만 꽃이 너무 작아 현미경으로 들여다봐야 할 지경이었다.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가을 파종을 한다. 내한성이 강하다. 이런 특징들이 말하는 것은 한가지였다. 겨울이다. 물망초는 추운 겨울을 나고 봄에 꽃을 피운다. 가을에 씨앗을 심고
집 안으로 들여놓은 것은 과잉보호였다. 나의 결정적 실수는 씨앗의 겨울을 빼앗은 것이다.
전문가들은 꽃눈의 분화를 돕기 위해 씨앗을 냉장고에 일정 기간 보관한 후에 심기도 한다. 씨앗을 속여 인위적으로 겨울을 나게 해주는 것이다. 씨앗은 잠자는
상태인데 일정 기간의 추위는 씨앗의 잠을 깨우는 자명종이 된다고 한다. 그 작은 씨앗 속에 숨겨진 생명의
고집, 그 고유의 성질을 사람이 마음대로 바꿀 수 없다.
주일
예배를 마친 후 다과를 나누며 한 주의 삶을 나누는 시간이었다. 열여섯 살 진이 말했다. 이사 간 새 동네의 아이들은 모두 부잣집 귀공자들이라 유명 브랜드 옷을 입고 고급 차를 타고 다녀서 기가 죽는다고. 그리고 그 애들은 자기를 친구로 끼워주지 않는다고.
그러자 세 살
위인 요한이 조언을 했다. “나도 전교에서 몇 명 안 되는 동양인이었어. 혼자 노는 법을 배워봐. 난 러닝맨을 틀어놓고 신라면을 먹었지.” 많이 외로웠을 어린 그의 모습을 상상해보니 코끝이 찡했다.
“그리고
부잣집 아이들이 누리는 것은 부모님들이 이룬 것인데 그 애들의 부모님과 너 자신을 비교한다는 건 좀 이상하지 않아? 결국 별로 부러워할 일이 아니야.” 의젓한 요한의 말에 나도 모르게
박수를 쳤다. 몸으로 겪어 얻은 지혜가 엿보였기에 더욱 기특했다.
노력하지
않아도 얻어지는 모든 것들이 인내와 배려가 없는 성인 아이를 만든다는 것을 진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생각의
깊이가 자라는 일에도, 성품이 다져지는 데도 겨울이 필요하다. 어른이
되도록 돕는 일에도 냉장이 필요하다. 안타깝지만 스스로 어려움을 이겨내도록 조금 떨어져 지켜보아야 하는
약간의 냉정함 말이다.
앳된
얼굴이 늠름한 사나이가 되기까지, 진은 지금 겨울을 지나고 있다. 추위를
감출 수 없어 가끔 나지막한 한숨을 내뱉는다. 그래도 작년 가을, 처음
만났을 때의 초조한 표정보다는 사뭇 달라진 모습이다. 그간 목도리와 장갑, 그리고 외투를 마련한 모양이다. 앞으로 벽난로에 넣을 장작을 마련하고
몸의 근육도 키워가며 이 겨울을 잘 견뎌내길 바란다.
아침에
창을 여니 첫서리가 하얗게 내렸다. 으아리 잎 가장자리마다 햇살에 부서진 은빛 보석가루가 반짝이고, 땅속 잠든 씨앗은 된서리를 맞는다. 만만치 않은 계절, 겨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