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병두 목사(유진 중앙 교회 담임)
오리 알의 섬김
갓 결혼한 신혼부부를 전도사로 맞이한 대지교회는
대지면 소재지의 유일한 교회였습니다.
유난히 날씨가 추웠던 1973년 2월21일, 고향인 경북 상주에서 결혼예식을 마친 후 바로 시외 버스장으로 향하였습니다.
비포장 도로 위를 시원하게 달리는 운전자의 머리 위에 걸린 그림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사무엘의 천진한 모습은 두려움과 호기심으로 들뜬 신혼부부의 마음에 평안함을 선물해 주었습니다.
창녕은 대구와 마산 사이에 위치한 활기찬 읍이었습니다. 우리 부부는 창녕읍 버스
대합실에서 한참을 기다린 후에 대지면 소재지로 가는 버스로 다시 갈아탔습니다.
해가 뉘엇뉘엇 기우는 때에
드디어 기다리던 교회 정문으로 들어섰습니다. 성병도 집사님이 반갑게 맞아 주었습니다.
그의 부인 박순악 집사님은 아이를 등에 업고 정성을 들여 저녁상을 차리고 있었습니다.
성도들은 아이들까지 합하여 열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전도사가
주일 예배를 인도하고 신학교로 떠나면 아내는 교회를 지키며 한 주간 동안 교우들을 만나기도 하고 교회를 찾아오는 손님들을 접대하면서 전도의 대상을
찾곤 하였습니다.
중, 고등 학생들이 하나, 둘씩 모여 들었습니다. 학생회를 조직하였습니다. 이웃
구미교회, 고암교회, 창녕읍교회, 신당교회 등에 이미 조직되어 있던 SFC(Students for Christ) 학생 신앙 운동원들과
연합 예배를 드리면서 믿음을 돈독하게 키워나갔습니다.
창녕여고에 다니던 현숙이라는 학생은 등교하면서 먼저
교회에 들려 기도하곤 하였습니다. 마을의 청년들이 관심을 가지고 교회를 찾아왔습니다.
교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살던 할머니
한 분을 전도하였습니다. 성함이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냥 봉이라고 불러주세요.” 우리는 ‘봉이
할머니’라고 부르곤 했습니다.
그 할머니는 고혈압으로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봉이 할머니는 지팡이 하나를 사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노인들이 흔히 사용하는 손잡이가
굽은 지팡이가 아닌 것으로 사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여러 가게를 찾아 다녔지만 찾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손잡이가 굽지 않고 예쁜 장식품으로 된 것을 발견했을 때 마치 소중한 보화를 발견한 것처럼 기뻤습니다.
지팡이를 사서 단숨에 달려갔습니다.
할머니가 기뻐함보다도 오히려 전도사인 제 마음이
더 기뻤습니다. 교회 옆으로 하천이 있었습니다. 장마철이 아닌 때에도
물은 마르지 않았습니다. 할머니는 고혈압에 오리 알이 좋다고 구할 수 없겠느냐고 물어왔습니다.
어느 따뜻한 봄날, 닷새마다 서는 창녕읍 시장에 갔습니다. 금방 부화한 듯한 오리 새끼 다섯 마리를 샀습니다. 그리고 사택 남쪽에 조그만 오리집을 만들었습니다.
오리들은 식성이 아주 좋았습니다. 파릇한 풀도 좋은 먹이었습니다. 사료는 그들에게 진수성찬 같았습니다. 성장속도가 의외로 빨랐습니다. 어느 날 오리들을 하천으로 데려갔습니다. 제 세상을 만난 듯이 오리들은 온 종일 물 속을 헤엄치면서
배부르게 먹었습니다.
그 해 가을에 오리들은 알을 낳기 시작했습니다. 아침에 알을 몇 개씩 낳으면 오리집 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날개를 퍼득이면서 힘차게 달려가는
곳은 교회 옆의 하천이었습니다. 해가 질 때쯤 되면 용하게도 줄을 지어 자기 집으로 찾아 들어갔습니다.
석양의 그늘이 짙어 질 무렵에 꽥꽥 노래하며 찾아 들어오는 오리들이 가장 반가운 식구들이었다며 아내는 웃곤 하였습니다.
누구보다고 기뻐한 분은 오리 알을 받아 든 봉 할머니였습니다. “전도사님,
이제는 원이 없어요. 이렇게 좋은 오리 알을 주시다니요… 꿈만 같습니다.” 할머니에게 교회는 가장 큰 위로였습니다. 비록 작은 시골의 교회였지만 한 사람 한 사람
교우들의 얼굴만 떠 올리면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는 가족들이었습니다.
다윗이 성전에 올라가면서 노래하였던 시편의
한 구절이 생각 났습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133편1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