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순(벨뷰)
한국말 하시네요
가슴을 두근
거리며 우편함을 열었다. 제발 받지
말았으면 하는 편지. 하지만 로고도
선명한, KCLS의 하얀
봉투가 있다. 벌써 몇
번째인가.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훌륭한 지원자가 많았고, 우리는 이
자리에 적합한 다른 지원자를 뽑았습니다. 다음에 응시할
때에 이 인터뷰의 영향은 없습니다. 우리 기관에
기여하고자 하는 당신의 노력에 감사합니다.”
인터뷰를 한 사람들은
채용되었을 때는 전화로, 안 되었을
경우에는 편지로 통보를 받는다. 결코 반갑지
않은 이 편지의 내용을 이제는 달달 외울 지경이 되었다.
내가 지원한
곳은 킹카운티 도서관이었다. 책과 도서관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좋았다. 또한, 도서관이 운영되는 방식도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대출카드 하나로 관내 45개 어느
도서관에서나 100권까지 책을
빌릴 수 있고 또 아무 도서관에나 책을 반납할 수 있다. 외국어 도서와잡지, 신문도 다양하게구비되어 있다.
수년 전, 시애틀에 와서 이민 짐을
풀었을 때는 영어도 시원스럽게 하지 못하고 늘 한글로 된 읽을거리에 목말라 있었다. 그런데 우연히
들른 공공 도서관에서 한국어로 된 신문과 잡지, 소설책을 만났을 때의
반가움이란. 그 후
이곳 도서관의 매력에 푹 빠져 지냈다.
그런데 중국말을
하는 직원, 일본어를 하는 직원도
여럿 있는데, 한국사람들이 꽤 많이
도서관을 이용하는데도 한국말을 하는 직원은 만나지 못했다. 그 역할을
내가 해내고 싶었다.
킹카운티 관내 도서관은
사서직원을 채용할 때, 인력 은행제를
시행하고 있다. 먼저 이력서와
지원서를 심사한 후에, 2단계로 전화
인터뷰를 통과하면, 3단계에선 두 시간에
걸쳐 면접관 인터뷰가 있다.
그리고 마지막 4단계로 현장
실무능력 평가가 있다. 이들 점수를
합산해서 인력 은행에 들어간다. 개별 도서관에서
직원 채용을 공지하면, 인력 은행에
있는 사람들이 지원하고, 지원자 중에서
점수가 높은 다섯 명에게 인터뷰 기회를 준다.
다행히 나는
인력 은행 점수가 높은지, 원하는 지역
도서관에 자리가 날 때마다 인터뷰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인력
은행에 들어갈 때와는 달리, 직접 채용하는
지역 도서관의 인터뷰 결과는 늘 신통치 않았다.
어떤 옷을
입을 것인지, 어떤 대답을
할 것인지, 모범 답안을
만들어 연습도 하였다. 인터뷰 직전에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영어가 술술
잘 되도록 기도했다.
그러나 결과는
늘 좋지 않았다. 처음이니까 다음 기회에
잘하자. 이번엔 잘한
것 같은데 왜 안 됐지? 아마도 그
사람들과 잘 아는 사람이 응시했나 보다. 긴장하지 말고 웃으면서
좀 더 편안하게 할 걸 그랬어. 처음 몇
번은 이렇게 스스로를 위로했다.
어느 날은
인터뷰 직전에 한국 가게에 갔는데 우황청심환이 번쩍 눈에 띄었다. 청심환을 먹으면 긴장이
덜해 편안하게 말을 할 수 있으려나? 청심환을 집어 들었다. 잘 아는
가게 아저씨가 왜 청심환을 사느냐고 물었다. 사연을 듣더니, 아저씨는 남의 속도
모르고 껄껄 웃었다.
“아니, 그 나이에 뭘 떨고 그래요? 편안하게 해서 되면
되고, 안 되면
안 되는 거지. 속 편하게
생각하세요.”
그러나 우황청심환을
먹고 차분하게 인터뷰를 했는데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내 영어
때문인가? 삼십 대
중반에 이민 온 내가 어떻게 이곳에서 대학을 졸업한 사람처럼 영어를 완벽하게 한단 말인가?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을
정도면 다른 장점을 보아서라도 좀 뽑아주지.
그 면접관은
아시안을 안 좋아한다는 소문이 있던데, 정말인가? 아니다. 그 사람도 자기가 생각하는 최고 적임자를 뽑으려고 했을 뿐, 나를 싫어할
리가 없어. 기도를 열심히
하지 않아서일까?
인터뷰 후에
받은 거절 편지가 쌓여갈 때마다 이렇게 잡다한 생각으로 얼굴이 화끈거리고 마음이 일그러졌다.
정말 성실하게
잘할 수 있는데, 왜 나를
몰라 주나? 대답 몇
번 잘하는 걸로 어떻게 사람을 다 알아본다는 것일까? 이제는 영어를
하며 밥을 먹고 사는 일은 포기해야 하는 것일까? 뭐 거대한
일에 도전하는 것도 아니고, 가족에 도움이
되도록 일정한 수입을 가져오고, 여가 시간에는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내 작은 목표일 뿐인데 좌절의 연속이었다.
어느 날은
출퇴근하기에 다소 먼 거리까지 인터뷰하러 갔다. 인터뷰를 잘하고 나서는
이번에 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까지 하면서 나왔다. 결과는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오기가 생겼다. 나의 가치를
알아줄 사람이 있을 거란 믿음을 버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내게 가장
알맞은 직장을 아직 못 만났을 뿐이라고 믿었다. 채용이 안
되었다는 편지들도 버리지 않고 차곡차곡 모아 두었다. 이 일은
이제 내가 꼭 이겨야 하는 게임이 되었다. 지금 고비를
넘기지 못하면 이 좌절감을 가지고 평생 이민 생활을 할 것이란 생각에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이력서를 새로운 스타일로
작성하고, 내가 일할
수 있는 거리의 도서관에 부지런히 대체 근무를 다녔다. 누가 결근을
했을 때, 대신 근무하는
일이었지만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잠재적으로 나를 고용할 사람들이었다. 부지런히 일하고, 모르는 것은 열심히 배웠다.
다양한 사람들에게서 일을 배우니 좋은 점도 많았다. 특히, 사람들과 어색하지 않게 대화를 이끌어가는 법을 알게 되었다.
식물 가꾸기가 취미인 사람들과는 올해 화단에 무엇을 심었는지, 개를 키우는
사람들에게는 개에 대해 궁금한 것을 물어보고 개 키우는 이야기도 들어주고, 자녀가 있는
사람들과는 아이들 교육 이야기, 미혼인 사람에게는
요리 이야기나 맛집 등에 관해 이야기하다 보면 금방 친해지고 같이 일하는 것이 즐거웠다. 누군가 나에게
말을 걸어주길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다가가니
사람들도 나를 기억해 주었다.
드디어 사람들이
싫어하는 숫자 13번째 도전을
하는 날이 왔다. 하필 그날은
금요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날 고속도로에서 본 택시 뒷면에 적힌 전화번호를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한국사람들이 보면 기절할 444-4444가 택시
회사 전화번호였다. 사람들의 상식이란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질 수 있는 것이다. 불행한 ‘13일의 금요일’이 될 것인가, 통념을 뒤엎게
될 것인가. 다른 때보다
더 열심히 준비하고, 면접관들이 권하는 의자에
앉았다.
살아오면서 가장 큰
실수는 무엇이었나요? 당신이 이룬
가장 큰 성취는 무엇인가요? 팀원이 일에
대해 불평을 할 때는 어떻게 할 건가요? 당신은 우리
기관의 다양성에 어떻게 이바지할 수 있나요? 스트레스는 어떻게 해소하세요? 왜 이
직장을 원하시나요? 이 인터뷰는
어떻게 준비했나요? 마지막으로 질문 있나요?
침착하게, 가끔은 미소를 지으며 또박또박 대답했다. 마지막 질문엔 면접관들에게 물었다. 여러분은 무엇이 좋아
이 직장에 몸담게 되었나요? 제가 앞으로
일하게 된다면 무슨 조언을 해 주고 싶으세요? 인터뷰가 끝났을 때, 앉아있던 면접관이 일어나 눈을
마주치며 악수를 청했다. 나도 손에
힘을 주어 악수를 했다.
며칠 후에
마침내 전화를 받았다. 아, 이제는 인터뷰를 하지 않아도 되는구나! 무엇보다도 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이 제일 좋았다. 몇 번
실패하다 보면 그 일을 포기하기 쉽다. 상처받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열두 번이나
불합격 통지를 받았다. 그 때마다
몰려드는 열패감과 싸우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그러나 잘
이겨내었다.
지난 봄에는
외국어 도서 관련 서비스 향상을 위한 위원회의 일원이 되어 활동하였다. 어떻게 하면
영어가 부족한 이민자들을 위해 더 나은 서비스를 할 수 있을까를 집중적으로 논의하여 도서관 정책 결정에 반영하는 위원회였다. 거기에 참여함으로써
한국어를 비롯한 외국어 서적을 더 적극적으로 배치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도서관에 영어가 서툰
한국사람이 오면 알아보고 묻는다.
“한국말 하세요? 제가 한국어로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어머, 한국말 하시네요!”
깜짝 놀라며
반가워 하는 사람들이 모국어로 원하는 책을 빌려 가는 모습을 보면 기쁘다. 내가 한국에서
온 것을 아는 타민족 사람들이 서툰 한국어로 인사를 건네기도 한다.
‘아니영하세요?’ ‘캄싸함니다.’ 그들의 호의에 기분이 좋아진다. 나도 모르게
한국을 대표하는 느낌이 든다.
이제는 포기하지
않고 13번이나 도전한
것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다. 나아가 누군가가, 저이도 하는데
나도 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면 좋겠다. 12통의 거절의
편지들을 차곡차곡 정리하여 넣어둔 상자를 열어본다. 나의 도전의
힘이 이 상자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