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준 장로(칼럼니스트)
순리에
역행하는 세상
어느
철학자가 “우주는 질서이다”라고 말했듯이 저 광활한 우주와, 우리가 일상 대하고 있는 자연은 정연(整然)한 질서 속에 운행되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에 보던 하늘의 은하수와
북두칠성은 지금도 여전히 제 위치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지구의 자전과 공전에 의해 밤과 낮, 봄ㆍ여름ㆍ가을ㆍ겨울이 순환하는 그 질서와, 달의 인력에 따라 규칙적으로
밀려나가고 밀려오는 망망한 바다의 조수는 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동일하고 만년 후에도 변함이 없을 것 입니다.
이
자연의 질서는 인간의 지혜나 힘으로 변개시키거나 보완시킬 수 없을 뿐 아니라 그렇게 할 필요가 전혀 없을 만큼 완벽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자연의 질서들은 인간의 생존과 생활과 복락을 위해 조물주가 설비해 놓은 것들입니다.
우리
인간에게 이러한 자연의 질서를 누리며 살게 하신 조물주는 또한 그 속에서 우리가 생육하고 번성하도록 섭리하시며 축복하셨고(창 1:28, 9:1) 그 축복을 이루어가시기 위해 또 다른 질서를
정해 놓으셨습니다.
오래
전 필자가 미국으로 이민 오기 직전에 장인 내외분의 회혼식(回婚式)이
있었습니다. 두 분이 결혼하시고 60년을 해로하시는 동안에
얻은 슬하의 자녀, 손, 증손들이 모두 32명이었습니다. 그 당시 대부분의 가정들이 선호하던 자녀의 성 비율은
아들 둘에 딸 하나 였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인간의 여망에도 불구하고 그 32명의 후손들 중에는 남자가 16명 여자가 16명 동수였습니다. 인간이 선호하는 2남1녀의 기대는 완전히 무시되고 말았습니다.
이
남녀의 성 비율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나 동수였습니다. 역사상 성 비율 문제 때문에 부족한 남성을 다른
나라에서 수입해온 나라도 없고, 남아도는 여성을 다른 나라로 수출한 나라도 없습니다.
몇 차례 겪은 세계대전으로 인해 한때 남성 인구가 다소 감소된 나라들이 있었지만 몇 년 사이에, 물이 수평을 이루듯이, 자연스럽게 남녀의 비율은 제자리로 돌아갔습니다.
과거에 그러했듯이 앞으로 수 억년이 지나도 남녀 동수 비율은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굳이 성경의 내용까지 인용하지 않더라도
눈에 보이는 현상과 역사의 사실들이,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합하여 가정을 이루며 생육하고 번성하는
복을 누리는 것이 조물주의 창조 질서에 따르는 순리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또
하나의 순리를 생각해 봅시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타고난 본능이 있습니다. 그 본능들 중 대표적인 것이 식욕과 성욕입니다. 그러한 본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수치도 아니고 잘못도 아니며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것들입니다. 식욕이 없다면 생명을 유지할 수 없고, 성욕이 없으면 생육과 번성의
길은 막히게 될 것이고 인류 번영의 희망은 끊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시대의 풍조가 이상하게 흘러, 인간이 그에게 주어진 본능을 여과 없이 발휘하는 것을 자유요 인권이요
자연스런 순리라고 인정하기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창조주께서는 인간에게 필요한 본능적 욕망을 주시면서 동시에 그 욕망을 적절하게 조절하고 절제시키는 기능으로 이성(理性)과 양심, 더 나아가서 종교인들에게는 신앙적 양심이라고 하는 제어장치를
갖추어 주셨습니다.
그
어떤 본능적 욕망이든지 그것을 지나치게 남용하거나 잘못 오용할 때에는 반드시 그 개인이나 사회에 고통과 불행을 가져오기 때문에 그 예방책으로 부여하신
기능입니다.
인간은
그의 본능적 욕망이 이성과 양심에 의해 절제되고 조절되어질 수 있어서 인간인 것 입니다. 그러기에 본능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절대로 인간이 따라야 할 순리가 아니며, 이성과 양심에 의하여 순화된 본능을
따를 때에만 그것이 순리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현기증을 느낄 정도로 급격히 퇴락해가면서 모든 순리를 거역하며 하나님의 섭리에 역행하고 있습니다.
갈수록
드세지는 이 세속의 물결을 헤쳐 나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힘이 들고
어려워도, 그리고 그 어떠한 피해와 고통이 따른다고 해도 굽힘 없이 따라가야 할 길이 있습니다. 진리의 말씀에 근거한 ‘순리의 길’
입니다.
**김 준 장로의 <신앙과 생활>을 추가로 보시려면 아래를 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