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시애틀지사 고문
‘I am sorry’
가장 하기 어려운 말이 뭐냐고 물으면 옛날 국민학교 교과서에 나온 “뜰의 콩깍지,
깐 콩깍지인가,
안 깐 콩깍지인가”를 댈 사람이 많을 터이다.
교과서는 “예, 아니오”가 더 어려운 말이라고 가르쳤지만, 나는 성인이 된 뒤 세상에서 가장 하기 어려운 말이 따로 있다는 걸 알았다.
1970년대 세계를 풍미한 록 가수 엘튼 존이 가르쳐 준 “미안합니다”이다.
“당신이 날 사랑하도록 하기 위해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할까요…당신에게 나의 진심을 알리기 위해 무슨 말을 해야 할까요…당신이 떠나고 상황이 점점 악화되는 이 서글픔 속에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할까요…미안이라는 말은 가장 하기 어려운 말 같아요(Sorry
Seems To Be The Hardest Word)…”라며 애인에게 사과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내용이다.
‘쏘리’는 연인들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하기 어려운 말이다. 하기 싫어하는 말이라는 게 더 정확하다.
정치인도, 사업가도, 연예인도 어떻게 든 이 말을 피하려 든다. 속된 말로 ‘쪽 팔리기’ 때문이다.
법정에 선 피고인들은 한사코 이 말을 쓰지 않는다. 섣불리 ‘쏘리’라고 말하면 피의사실을 시인하는 꼴이 돼 불리한 판정을 받을 수도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사과합니다’라는 뜻의 ‘아이 앰 쏘리’를 즐거이 말하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미국사회엔 ‘사과 아닌 사과(Non-apology
apology)’가 만연한다.
사과하는 말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사과가 아니다. 대표적 예가 “제 말이 그렇게 들리셨다니 죄송합니다”이다. 자기 말엔 잘 못이 없지만 상대방에 잘 못 투영된 것을 사과한다는 투이다.
정치인들 사이에는 ‘혹시(if)
사과’가 유행이다.
“혹시 제 말이 마음에 거슬린 분이 있다면 사과합니다”라는 표현이다.
자기 말 자체는 옳다는 고집이 개재돼 있다. 1992년 마리오 쿠오모 뉴욕 주지사를 인종적으로 폄훼한 빌 클린턴 대통령은 “혹시 제 말이 쿠오모 지사나 이탈리아계 미국인들을 멸시하는 것으로 들렸다면 깊이 사과합니다”라고 말했었다.
번짓수가 틀린 사과도 많다. 가수 테드 뉴젠트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인간이하의 잡종’이라고 욕했다가 비난이 일자 사과성명을 냈다. 하지만 그는 ‘거리의 쌍말’을 사용한데 대해 사과했을 뿐 오바마 대통령에게는 일언반구 사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오바마 대통령이 헌법 위반자요 거짓말쟁이라고 말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 사과한다고 덧붙였다.
LA 클리퍼스의 도널드 스털링 전 구단주도 마찬가지다.
그는 전설적 흑인 농구선수인 매직 존슨에 대해 인종모욕적 험담을 늘어놔 구단주 자격을 빼앗긴 후 지난주 CNN-TV와의 인터뷰에서 자기 말이 논란을 일으킨데 대해 사과했지만 존슨에게는 사과하지 않았다.
오히려 에이즈 보균자인 존슨은 젊은이들의 롤 모델로 적합하지 않다며 험담을 계속했다.
‘연설의 달인’이었던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은 ‘수동태 사과’의 창시자로 유명하다. “실수가 저질러졌습니다”라는 표현이다. 주어인 ‘누가’가 빠졌다.
그는 1986년 미국‧이란‧이스라엘‧니카라과가 연루된 무기 밀거래 스캔들이 들통 나자 전국 라디오 방송을 통해 “실수가 저질러졌다(Mistakes
Were Made)”고 사과했지만 정작 책임소재 문제는 얼버무렸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주 ‘세월호’ 참사를 눈물로 사과했다. 담화 내용을 놓고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지만 훌륭한 사과다.
첫 마디가 “최종 책임은 대통령인 저에게 있습니다”였다. ‘혹시’도, ‘수동태’도 아닌 직설적 사과다. 수습대책과 책임문제도 짚었다. 그런 사과를 더 일찍 했어야 했다. 사과 자체는 전혀 문제가 없고 앞으로 사과 내용의 실천여부가 문제다.
박대통령 사과보다 더 감동적인(?) 사과를 며칠 전에 들었다. 사과라는 단어가 사전에 없을듯한 북한에서 일어난 일이다. 평양 시내에 신축한 23층짜리 아파트가 44년전 서울 와우아파트처럼 무너져 수백 명의 사상자가 나자 북한 정부가 전례 없이 국민에게 사과했다. 오래 살고 볼 일이다. 김정은도 “미안이 가장 하기 어려운 말”임을 실감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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