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돈하 목사(오레곤 벤엘장로교회 담임)
용서를 넘어 화해하는 방법
사도바울은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롬 12:18)”고 권면합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가르치셨을 뿐만 아니라 그 본을 직접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사실을 지적하며 성도들에게 용서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고
강조합니다.
왜 용서해야 합니까?
그 이유는
내가 살기 위해서 입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자신의 몸과 마음이 죽게 됩니다. 미움의
포로가 된 나머지 밥맛도 잃고 잠도 오지 않고 사랑해야 할 사람들에게 상처를 줍니다.
정작
가해자는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복수심이 차 있으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려워집니다 (요1서 4:20). 기도가
잘 되지 않고 영혼이 병들게 됩니다 (요1서 4:20).
결국
용서하지 않는 것은 가해자 아닌 자신을 죽이는 길입니다. 이렇듯 복수는 독이 되고 용서는 약이 되기 때문에 자신을 위해 용서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용서할 수 있을까요?
그 방법은 첫 단계로 완전히 하나님께 복수심을
맡기는 것입니다. 용서의 헬라어인 '아피에미'는 '붙잡고 있는 것을 놔버리다'는
뜻입니다.
즉 용서는 붙들고 있던 복수심을 놔버리는 것입니다. 성경은
복수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원수 같은 것을 하나님께 맡기라고 했습니다 (롬 12:19).
왜 그러셨을까요?
인간은 정의에 있어 결코 완전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항상
당한 것보다 확대하거나 축소해서 보복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복수는 언제나 미완성입니다.
원수를
갚으려 했다가 갈등이 풀리지 않고 더 심각해집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심판을 맡기면 정의에 있어 완전한 그 분이 우리 대신 공정하게 처벌해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어떻게 하나님께 원수 갚은 것을 맡길 수 있을까요? 그 방법이 바로 기도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 증오심을 감추지 말고 솔직한 마음을 털어 놓아야 합니다.
내가
가해자로부터 상처받은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나의 분노, 억울함, 수치심과 죄책감을 쏟아 놓을 때 놀라운 변화가 생깁니다. 그 변화는
혐오스럽던 나의 원수가 불쌍하게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단계로 용서를 결단해야 합니다. 용서하는
마음이 들 때까지 기다리려 했다간 그 시간은 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용서 뒤에 오는 하나님의 상상할 수 없는 축복을 놓치게 됩니다. 그래서
용서는 결단하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가해자가 나에게
잘못한 것 보다 더 말도 안 되는 죄를 짓고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지만 십자가에서 무조건적으로 용서받은 은혜가 얼마나 컸는지 되새길 수 있어야 합니다. 용서하기로
결단할 때 용서하는 마음은 따라옵니다.
마지막으로 용서는 화해 단계까지 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용서와 화해를 비슷하게 생각하지만 차이가 있습니다. 용서는 가해자가 변화되지 않는 상태에서도 내가 일방적으로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화해는 반드시 쌍방 간의 변화가 동반되어야 합니다. 용서와 화해 이 두 가지가 모두가 중요한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용서는
화해를 향해 가는 출발이기 때문에 용서가 소중하고 또 용서는 화해까지 갔을 때에만 완전해 질
수 있기 때문에 화해가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용서의 제물을 넘어서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죄 하나
없으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용서해 주신 것으로 끝낸 것이 아니라 화해까지 이루셨습니다. 이처럼
큰 은혜를 받은 우리들도 각각의 작은 삶의 현장에서 용서의 제물을 넘어 화목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나는 용서를 결심했지만 아직 가해자가 사과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도 실망하지 말고 용서와 화해의 하나님이 여러분을 위로하고 칭찬해 주시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용서를
넘어 화해의 날이 오기를 기도하고 준비한다면 반드시 야곱과 에서, 요셉과 그 형제들처럼 화해의 밝은 날이 찾아올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