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돈하 목사(오레곤 벧엘장로교회 담임)
끝이 더 아름다운 삶
지난 주간 한 성도님의 장례식이 있었습니다. 이 땅에서의 그분의 마지막 순간은 저에게도 매우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사람은 언제 세상을 떠날지 모릅니다. 일반적으로 임종 순간은 자녀들도 지켜보기 힘들다지만 그 분은 마침 제가 심방 중 귀에 대고 전한 말씀을 들으면서 주무시듯 소천했습니다. 예배 중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으신 것이 참 복되게 느껴집니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반드시 일대일로 죽음을 맞게 됩니다. 하지만 죽음은 믿음의 유무에 따라 완전히 다른 각도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는 자에게 죽음은 영원한 멸망의 날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자들에게 죽음은 절대 절망적이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와 만나는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도 죽기직전까지 십자가에서 견디기 힘든 육체적, 심리적 고통을 경험하신 것처럼 우리도 죽기 전까지 거쳐야 하는 아픔의 시간이 있습니다. 이 아픔은 종류가 다양합니다.
어떤 사람은 갑작스러운 사고나 육체의 질병으로 힘든 시간을 보냅니다. 혹은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좁은 공간에서 외로움과 싸우는 분들도 있습니다. 특히 이 죽음 직전의 고통은 인간의 마음을 깊은 무의미와 공포에 질리게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죽음 직전의 고통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먼저 죽음이 다가올수록 자신의 인생이 무상하게 느껴지는 허무감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사탄은 질병과 노화의 길을 걸을 때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지게 만듭니다.
그러면서 우리 영혼의 귀에 대고 ‘과연 네가 인생을 살면서 이룬 것이 무엇이냐?’고 속삭입니다. 이 질문에 대답할 게 없다고 생각될수록 헤쳐 나오기 힘든 절망의 수렁에 빠져들게 됩니다.
이럴 때 우리는 내가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인지 불변하는 말씀 속에 확인해야 합니다. 세상은 건강, 나이, 지위, 재물, 업적에 따라 나의 가치를 매기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분 안에서 나는 영원히 변함없는 가치를 가집니다. 왜냐하면 우리 각자는 하나님이 당신 아들의 생명과 바꿔 구원한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죄인처럼 여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아들의 피로 씻어 구원한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르십니다. 우리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죽음 가까이 갈수록 자신을 무가치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그 분 안에서 얼마나 무한한 가치를 가지는지 자신을 바라보도록 시각을 교정해야 합니다.
또한 죽음의 문턱에 이를 때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은 하늘의 문을 열어 고통을 견딜 수 있는 힘을 내려 주십니다.
저는 그간 목회하면서 많은 성도님들의 임종을 지켜보았습니다. 하나님과 깊은 사귐 속에 있는 성도님들은 죽음의 문턱에 이르면 영안이 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평범한 사람들은 결코 보지 못하는 것을 분명히 보는 것을 느꼈습니다. 어떤 분은 광명을 보기도 하고 천사를 보는 분도 계셨습니다. 그것은 이성이나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신비입니다.
앞에서 말씀 드린 분도 소천하기 하루 전에 천사를 보았다고 했습니다. 가족들도 별세하신 어머니가 그 체험 후에 불안한 마음이 사라지고 기쁨과 용기가 생겼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도 십자가를 지기 전날 밤 땀이 핏방울이 되기까지 기도하실 때 천사가 내려와 도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성도가 믿음을 가지고 죽음의 동굴에 들어갈 때 하나님이 특별한 은혜로 도와주십니다.
천국으로 연결된 죽음의 동굴을 완전히 빠져 나오기 까지 한 치도 떠나지 않고 그들의 오른손을 잡고 동행해 주십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죽음은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의 소중한 가치를 재확인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의 손길을 체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