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준 장로(종교
칼럼니스트)
모두 함께 풀어야 할 과제
대부분의
선진국들이 채택하고 있는 자본주의 경제제도도 그것이 완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부작용으로 나타나고 있는 폐단이 부익부 빈익빈의 현상입니다.
이
부작용을 법이나 제도의 개선을 통해서 해소해 보지만 자칫하면 개인의 자유가 침해되고 기업이 위축되는 문제가 따르게 됩니다.
프랑스의
경제학자 토마스 피케티를 비롯해서 많은 경제학자들은, 만일 빈부의 격차를 방치하게 되면 그것은 민주사회를
위협하고 계급전쟁이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역사에 나타난 모든 반항, 폭동, 쿠테타, 혁명들은
대부분 부의 불균형이 원인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옛날 맹자도, “백성의
원망과 불평은 가난 때문이 아니라 불평등에서 기인된다.”라고 지적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어려운 경제 문제에 대한 해답을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비유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마 20:1~16) 포도원 주인은 이른 아침 일거리를 찾고 있는 사람들에게 일당1달란트씩 주기로 약속하고 포도원으로 보냅니다.
그 후로9시, 12시, 3시, 5시에도 보냈습니다. 저녁 때 주인이 품삯을 지급하는데, 5시에 와서 1시간 일한 사람,
12시에 와서 5시간 일한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1달란트씩
지급했습니다.
그것은 경제원리에도 맞지 않고 공정하지도 않은 처사였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그런 합리성이나 정당성을 넘어 저녁 식탁을 마련할 품삯을 들고 올 가장을 기다리는 가족들의 처지까지
넘겨본 사랑의 배려였던 것입니다.
즉 정의의 질서를 사랑의 질서로 대신한 것이었습니다. 정의로 시작해서 정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정의의 질서를 사랑의 질서로까지 승화시키는 것이 기독교 정신입니다.
이처럼
높은 경제관을, 이해타산과 영리적인 안목에만 편향되어 있는 재벌이나 기업주들에게 기대할 수 있을까요. 기대할 수 있고 또 기대해야 마땅합니다. 그 길이 정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모범적인 기업인들 중 한 분을 예로 들겠습니다.
미국의
재벌 록펠러는 33세에 백만장자가 되었고, 43세에 미국의
최대 부자가 되었습니다. 53세에는 세계 최대 갑부가 되었지만 행복하지는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55세에 불치의 병으로1년 이상 생존할 수 없다는 진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최종 검진을 받기 위해 휠체어를
타고 병원 복도를 지나가다가 우연히 로비에 걸려있는 액자에로 시선이 끌렸습니다.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라고 쓰여 있는 글을 읽는 순간 그의 마음 속에 선한 기운이 온 몸을 감싸는 듯한 느낌과
함께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그가 눈을 지긋이 감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데 갑자기 떠들석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병원비를 지불해야 치료를 할 수 있다는 병원측과, 우선
딸의 생명부터 구해달라고 애원하는 어머니의 소란이었습니다.
그것을
본 록펠러는 비서를 시켜 익명으로 그 소녀의 치료비를 지불하였습니다. 얼마후 그 소녀가 기적적으로 회복이
되자 그 모습을 보고 록펠러는 얼마나 기뻤던지 그 순간을 그의 자서전에서 이렇게 술회하고 있습니다.
“나는
살면서 그렇게 행복한 삶이 있는 줄을 몰랐습니다. 그때부터 나는 나눔의 삶을 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 후로 신기하게도 그의 질병까지 사라져 그는 98세까지 장수하면서
수많은 봉사와 공헌을 남기면서 값진 여생을 살았습니다.
록펠러나
카네기 같은 과거 재벌들의 기부 실적은 말할 것도 없고 최근에는 빌 게이츠가 재산의 95%를, 버핏이 98%를, 저커버그가 99%를 기부하기로 약정하였고 이러한 기부 약속에 동참하기로 서명한 억만 장자가 187명이나 있습니다. 이러한 기여정신에 투철한 재벌들이 증가하고
있는 한 자본주의 미래는 밝아질 것입니다.
실로
이 빈부격차의 문제는 재벌로부터 이웃의 어려움을 돕는 작은 손길에 이르기까지 다 함께 극복해야 할 사랑의 과제입니다.
**김 준 장로의 <신앙과 생활>을 추가로 보시려면 아래를 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