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근
목사(시애틀 빌립보장로교회 담임)
아버지
엄마
가시고기는 알을 낳고서 떠나고 아빠 가시고기 혼자 남아 알이 부화하는 15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고
알을 보호한다. 그러다 새끼가 알에서 깨면 아빠 가시고기는 죽는다. 그
새끼 가시고기들은 아빠 가시고기의 살점을 뜯어먹으며 살아난다. 이것이 대체로 가시고기에 얽힌 일화다. 이 같은 가시고기의 삶을 배경으로 소설을 쓴 이가 있다. 조창인이라는
사람이 주인공이다. 그는 <가시고기>라는 소설에서 아버지가 어떤 존재인지 담담하게 써내려간다.
다움이는 10살의 어린 몸으로 백혈병 때문에 죽음과 삶의 경계선을 여러 번 갔다 왔다.
다움이 아빠 정호연은 실력은 있지만, 발휘를 못하는 아까운 시인이다. 적은 월급으로는 다움이 치료비, 입원비는 감당도 못한다.
다움이의 엄마는 다움이와 다움이 아빠를 다움이가 6살 때 버리고
떠나버렸다. 다움이 아빠는 밀린 병원비 때문에 원무과를 자주 들른다.
그러던 어느 날 다움이의 담당의사는 정호연을 불러 약물과 방사선으로 이미 한계에 도달했다는 것을 알린다. 다움이를 살리는 방법은 골수이식 밖에 없다는 것을. 그러나 다움이에게
맞는 샘플이 없다.
고통만 안겨주는 항암치료에게 맡길 수도 없다. 다움이에게
그 짧고 귀한시간마저 고통 안에 살지 않게 하는 것이 아버지의 마음이다. 그래서 다움이를 데리고 사락골이란
작은 산골에 데려간다. 어느 할아버지가 약초도 캐주고, 뱀도
잡아주고… 그래서 다움이의 기본체력이 상당히 좋아졌다.
그러던
어느 날 다움이의 병이 재발한다. 그래서 다시 서울로 옮겨간다. 그러다
다움이가 살 수 있는 희망이 생겼다. 딱 맞아 떨어지는 샘플이 나왔던 것. 그러나 문제는 2,000만원이나 되는 수술비였다.
다움이 아빠 손에는 하루치 치료비도 없었다. 그래서 생각한 게 신장을 파는 것이었다. 신장을 팔기 위해
검사를 했는데 검사 결과는 간암말기였다. 다움이 아빠는 결국 각막을 팔아 6,000만원을 받았다. 정호연은 자신이 죽어가는 꼴을 보이기 싫어
다움이에게 모진 말을 남기고 다움이를 엄마한테 보낸다.
“진희씨, 이런
말 알아? 사람은 말이야… 아이를 이 세상에 남겨 놓은 이상, 죽어도 아주 죽는 게 아니래”란 말을 남긴 채 사락골 어느 페교에서
조용히 삶의 막을 내린다. 이것이 조창인이라는 사람이 가르쳐 준 아버지다.
오늘
우리는 과연 어떤 아버지들인가? 이처럼 비약적으로 살지는 않았지만 내용상으로는 공감하는 그런 삶을 살아오지
않았을까? 미국이라는 이 땅에 우리는 왜 왔던가? 정말 우리
아버지들만의 새로운 세상을 누리기 위해 왔던가? 거의가 자식들 때문에 온 것이 아니었던가?
영어 한 마디도 하지 못한 채 이 땅에 와서 과연 우리 아버지들은 어떻게 이민생활을 영위해 오셨던가? 오로지 자식들 잘 되기만을 소원하며 밤을 낮으로 삼고 일하고 또 일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그나마 자식들이 잘 자라 좋은 직장, 좋은 배우자 만나서
잘 살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고 감사한 일인가? 그런데 가시고기처럼 그것으로 끝이다. 아버지가 자식을 키우기 위해 고생하고 헌신한 바에 만분의 일도 자식들은 화답하거나 보답하지를 못한다.
그러나 어찌하랴, 세월이 그러한 걸… 그래서 늙으면 돈이 있어야 하고 친구가 있어야 하고 허전한 마음을 메꿔줄 사랑하는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자식이란
아버지의 할 도리를 다해서 출가시키면 그만인 것이다. 어느 목사 선배가 개척을 해서 교회를 잘 부흥시켜
아들에게 물려줬더니 “아버지, 이 교회를 인도하는 사람은
담임인 나니 아버지는 더 이상 간섭하지 말고 멀리 떠나 계세요”라고 했다며 혀를 끌끌 차며 탄식한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렇다. 목사 아들도 이정도인데 돈 밖에
모르는 세상 자식들이야 오죽하겠는가?
아버지들이여, 자식들에게 물려주려던 주머니를 풀어서 친구를 만들고 이제는 좀 즐기며 살아가시라! 돈이란 벌 줄도 알아야 하지만 더욱 잘 쓸 줄을 알아야 제대로 된 인생을 즐길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