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진 목사(루터교 은퇴/ 미주 크리스천문인협회원)
거룩한 씨(種子)
겨울이 지나 봄기운이 완연해지면 밭으로 나가 씨앗을 심으려는 농부들의 손길이 숨 가쁘게 돌아간다.
일제
치하로부터 광복이 됐던 해인 1945년 초봄이었다. 열두
살이었던 나는 아버님을 따라 집에서 멀리 떨어진 한 소작인의 집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소작(小作)인이란 다른 사람의 농지를 빌려 농사를 짓고 그 대가로 사용료를
지불하는 사람을 말한다. 당시에는 땅 주인인 지주가 해당 농지의 수확물의 50%를 가져가고 나머지 50%는 소작인이 가졌다.
그 소작인의 집 방안에 들어갔더니 종자 옥수수들을 새끼로 묶어 걸어놓은 옥수수들이 방안 벽에 가득했다. 그래야만
옥수수 알들을 바싹 말릴 수 있다고 일러줬다. 그 때 그 방에서는 아궁이에 장작불을 지펴 방안의 따뜻한
온기로 옥수수들을 한창 말리고 있었다.
옥수수 한 알 한 알이 땅에 떨어져 심어졌을 때 썩지 않고 싹이 잘나오게 하기 위해 농부들이 저렇게 애를 쓰고 있고, 씨앗 한 알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며 사랑하고 있는지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씨’를 헬라어로 ‘스빼르마(σπερμα)’라 하고 히브리어로는 ‘제라(Jera)’라 한다. 우리는 씨를 다른 말로 종자(種子)라고도 하는데 동식물이 번식하는 근본을 뜻하는 것으로 ‘벼 화(禾)’와 ‘무거울 중(重)’의 합성어다.
농부들은 종자로 쓸 옳은 씨앗을 골라내기 위해 물에 담근 뒤 가라앉는 것만을 골라낸다. 물에 가라앉는다는 것은 속이 가득 차서 무게가 있는 좋은 씨앗을 의미한다. 가라앉지
않고 물에 둥둥 뜨는 씨앗은 안이 비어있거나 부실해 땅에 뿌려져도 싹이 나오지 않는다.
이 같은 이치는 농부들뿐 아니라 성경의 주제와도 일치한다.
사도 바울도 성경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한다고 했고(디모데전서 2:4),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누가복음 19:10)고 했다.
그러기에 ‘누가’는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만을
바라보라고 했다(미가 7:7).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죄와
허물로 죽었던 존재였고(에베소서 2:1), 살았다 하는 이름만
가졌을 뿐 우리 모두 이미 죽은 자들이기 때문이다(계시록 3:1).
따라서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고
했는데(데살로니가전서 4:3) 그것은 ‘너희는 내게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출애굽기 22:31). 이 거룩은 성스럽고 위대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종류에 따라 갈라 놓는 구별을 뜻한다.
이 구별이 곧 새로운 피조물이다(고린도후서5:17).
우리 앞에는 항상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이 구별돼 있다.(예레미야 21:8). 이 생명의 길이란 ‘산 씨’의 길이고 사망의 길이란 ‘죽은 씨’의
길이다. 이 사망의 길에서 건져내시는 분은 한 분 밖에 없어 다른 무슨 힘으로도 이 일을 해낼 수가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다니엘 3:29). 그러기에 시편
기자는 주께서 내 생명을 사망에서 건지셨다고 했다(시편 56:13).
바로 이 건짐을 받은 씨와 건짐을 받지 못한 씨가 구별돼 ‘거룩한 씨’가 되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를 어둠(죽음)에 붙잡히지 않도록 하기
위해(요한복음 12:3) 어둠의 일을 벗고 빛(생명)의 갑옷을 입으라고 한다(로마서 13:12).
나는 지금 어디에 붙잡혀 있을까?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남은 하루라 생각하면 독일 사람들이 즐겨
외우는 속담이 늘 생각난다. “Endes Gut, Alles Gut(끝이 좋으면 모든 것이 다 좋다)”
좋은 끝을 위한 오늘을 살아가길 두 손 모아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