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순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그녀가 시를 쓴다
‘천장에 페인트를 바르는데 떠오른
시 한 수입니다. 작가 선생님의 조언을 부탁합니다.’
일하면서도 시상이 저절로 떠오르는가
보다. 남에게 시를 지도해줄 자격도 없건만, 한참 아래인
나를 꼬박꼬박 작가 선생님이라 칭하며 지도를 부탁한다.
그녀는 시 쓰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에 구성이나
형식은 조금 엉성하다. 그러나 그 시를 읽으면 나는 선생이 되기보다 그 풋풋하고 싱그러운 마음 조각을
엿보며 살짝 놀라게 된다. 일상을 보는 시선이 특별하기 때문이다.
시
제목들은 ‘페인트칠을 하며’, ‘발바닥’, ‘고구마’, ‘가위’, ‘들깨를 털며’, ‘신발’
등이다.
어느 날은 <고구마>란 시를 보냈다.
‘줄기가 꺾여/소리 없이 우윳빛 눈물/사이사이/ 땅속으로 빠알간 사랑 품어 알알이 고구마/ 어머니 젖가슴처럼 풍성해지네’
시골에서 받은 고구마를 쪄서 점심을
먹다가 떠오른 생각이다. 악착같은 가뭄과 땡볕을 이겨내며 땅속에서 고구마 알을 키워내기까지 과정을 어머니의
젖가슴으로 연결시켰다.
고구마 순을 내는 날, 줄기를 똑똑 잘라낸 자리에선 하얀 물이 떨어진다. 잎 자리가 있는
순을 잘라서 맨땅에 꽂으면 고구마는 거기서부터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뻗어 자란다. ‘제 살 아파 하얀
눈물 흘리는 고구마 순’이란 표현에서 그녀의 이십 대를 생각한다.
가난으로 학업을 계속할 수 없었던
그녀는 스무 살에 가게를 차렸다.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동생들은 공부를 시켜야겠다고 도시로 데려갔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을까? 하지만 곧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시동생들과 친정 동생들을 한 집에서 다 품어야 했던 이십 대의 그녀가 감당했을
어려움은 감히 짐작하기 어렵다.
척박한 땅, 지독한 가뭄에도
하늘 바라보며 줄기 뻗어 제 살을 나누어 빠알간 사랑을 품어 알알이 고구마. 그 시절 그녀가 밥 먹을
시간도 없이 열두 시간 이상 몸이 부스러져라 일하며 젖줄 물려 키워낸 고구마가 이제 제법 큰 밭을 이루고 있다.
<발바닥>이란 시는 자신을 잘 지탱해준
발 뼈마디에 대한 감사함을 나타내고 있다.
발바닥을 의인화하여 ‘어디로 구경갈까/ 닿이는 곳은 시커먼 시멘트 길/ 아, 어릴 때 놀던 신작로 길/딛는 곳마다 심장을 마사지해 주네.’
비 내리는 날, 가게에 손님은 없고 의자에 앉아 밖을 내다보니, 가게문의 선팅 아래쪽으로 부지런히 오가는 사람들의 발만 보이더란다. 그
발걸음들을 보니 뭔가 쓰고 싶었다고 한다.
그녀의 작은 두 발로 무거운 삶의 짐을 지탱했을 시간이 떠올랐다. 쉬는 날에는 고아원, 양로원을 찾아가 이발 봉사를 하고, 명절에 시골에 가서도 주위 어른들 머리를 손질해 드리느라 바빴다.
어느 해 겨울 방학, 4학년이던 동생이 도시에 조카를 돌보러 왔다가 시골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혼자
버스를 타고 가는 동생에게 부모님께 가욋돈을 보내고 싶었지만, 소매치기들이 걱정되었다. 비닐봉지로 지폐를 싸서 발바닥에 붙이고 양말을 신겼다. 맨몸으로
도시에서 삶을 개척해야 했던 그녀가 자신의 것을 보호하기 위해 체득한 지혜였을 것이다.
그녀는 십 년을 더 신었다는 내
신발 이야기를 듣고 시를 지어 보내기도 했다. 힘들 때는 늘 발밑을 보라 했다. 나보다 더 형편이 안 좋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자신이 얼마나 감사할
것이 많은 사람인지 알 것이라 했다.
자신의 것을 기꺼이 희생해서 타인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튼튼한 신발 한 켤레를 선뜻 신겨줄 사람은 많지 않다. 그 관계가 가족일지라도 말이다. 그런데 그녀는 그런 삶을 살았다.
그녀와 함께한 특별한 시간이 있었다. 그녀 집에서 보름간 지내면서 저녁을 먹고 같이 시를 읽었다. 그리고
시를 쓰고 싶어 하는 그녀를 발견했다. 그녀는 은퇴할 나이가 돼 간다.
나이가 든다는 것이 참 좋을 때도 있다.
이제는 가족들을 돌보고 생계를 위해 고된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는 나이. 그녀가 요즘 시를 쓴다. 보약이
된다는 누런 호박처럼 잘 여물었다. 그녀의 시 주머니에는 잘 영근 씨가 가득하다.
그녀가 쓰게 될 시들의 씨를 잘 북돋아주고 물을 주면 푸른 줄기를 뻗어 많은 열매를 맺을 것 같다.
'헐거워지고 누레지고 /보잘것없는 색채/긁히고 후비고 닦여 /분단장 곱게 치장하는 벽체…<중략> 화사한 봄맞이하는/ 은색 빛깔 곱기도 해라'
벽을 페인트칠하며 노래하는 그녀의
표정을 상상해 본다. 잘 여문 그녀가 시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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