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순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시애틀의
껌벽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은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걷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물결에
조금씩 밀려가는 형국이다.
신선한 야채와 어패류, 꽃을
파는 가게, 각종 민예품 가게를 까치발로 구경한다. 별다방 1호점에는 벌써 긴 줄이 늘어져 있다. 커피 한
잔 마셔보려고 한두 시간씩 줄을 서서 기다린다. 관광객은 태생적으로 줄을 잘 서야 한다. 기다리는 동안 수다를 떠는 동행이 있다면 그 시간도 즐겁게 갈 것이다.
먼
곳에서 재미 한국학교 학술대회에 온 선생님 몇 분을 위해 길잡이를 자청했다. 하지만 등잔 밑이
어둡다고 특별한 일이 아니고는 시애틀 다운타운에 나가는 일이 드물기에 시내 명소에 밝지 못하다.
손님들에게
가고 싶은 곳을 물었다. 영화에 나오는 알카이 비치, 다운타운의
스페이스 니들과 치훌리 가든 등 방문하는 이들이 시애틀의 힙한 장소를 우리보다 더 잘 알고 있다. 스마트폰과 SNS 덕분이다.
스페이스
니들, 파이크 플레이스 시장, 미술관 등
몇 군데 외에는 시내의 명소에 대해 잘 모르던 내가 껌벽을 알게 된 것은 P시인 덕이다.
시애틀을 방문했던 그분과 한나절 시내에 나간 일이 있다.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의 유명한 돼지 동상 옆 계단으로 내려가서 부두 쪽으로 가는 길에 껌벽이 있다. 계단
벽에는 자신의 솜씨를 알리려는 예술가들의 전단이 겹겹이 붙어 있다.
관광객들이 남기고 싶은
말을 써 붙인 색색의 포스트 잇도 가득하다. 계단을 내려가 부두 쪽으로 방향을 틀면 색상도 화려한
점들의 집합체가 나타난다. 저게 뭐지? 좀
떨어져 보면 영락없는 예술품이다. 호기심으로 가까이 다가가 보게 된다.
씹다
붙인 껌이다. 색상도 다양하다. 입의 즐거움을
위해 씹기보다 붙이기 위해 얼른 씹었을 껌은 단물을 다 빨아 먹지 않아서인지 아직 풍선껌의 습습한 냄새가 올라온다. 관광객들은 일부러 거기서 껌을 씹는다. 몇몇 관광객들이
풍선껌을 불고 있다. 적당한 여백에 자신의 껌을 꾹 눌러 붙인다. 껌을 붙이며 사진을 찍기도 한다.
통로의
벽은 갖가지 껌딱지로 인해 꽤 그럴듯한 색상과 입체적인 작품이 되었다. 불특정 다수가 완성한
추상화다. 연신 사진을 찍어 대는 사람들과는 달리 이번에 모신 선생님들은 징그러운 벌레가 가득
붙어 있는 벽을 보는 표정이다. 멀찍이 떨어져 서있던 일행 중 한 분이 말했다. “선생님, 빨리 가요. 나
토할 것 같아요!” 그분의 뜻밖의 반응에 움찔했다.
사실
껌벽이 모두에게 즐거움을 주는 장소는 아니다. 껌벽에서 행위예술을 읽어내고 짓궂은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릴 수도 있지만, 비위생적인 침의 얼룩과 추함을 볼 수도 있다.
몇 년 전, 비위생적이라는 주민들의 민원으로 껌벽에서
껌을 제거하는 작업을 했다. 하지만 누군가 저항하듯이 다시 껌을 붙이기 시작했고 껌벽은 부활했다.
껌벽은
발칙한 여행객들의 플래시 몹이다. 호기심 많은 관광객이 순례하는 성지가 되었다. 여행지마다 다르지만,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하는 욕망들이 만들어낸 명소가 있다.
전국의 유명한 산에는 등산객들이 한 개씩 올려 만든 돌탑이, 파리에는 여행객들이 채운 자물쇠 다리가 있다. 껌벽은
시애틀의 한 곳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려는 욕망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것은 역사적 명소에 ‘나 여기 왔노라’고 낙서를 남기는 것과 다른 유쾌한 행위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던진다. 뒤샹은 소변기를 뒤집어 ‘샘’이라
했다.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것도 아닌데 그 변기가 왜 예술인가? 얼굴 없는 낙서장이 뱅크시를 왜 예술가라 부를까? 예술이
쾌감을 주는 아름다움만 추구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의 슬픔, 고통, 기성 질서에 대한 반항 등도 예술의 한
정신이다. 껌벽이 존재하는 이유는 씹다 버린 하찮은 껌의 반항 정신 때문이다.
예술은
결국 어떻게든 자신을 표현하고 싶어 하는 욕망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그렇다면 껌벽은 깨끗하고
쾌적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고상한 예술에 대해 주먹을 날린다. 벽에 안착한 껌들이 여행객들에게
도발한다. 너도 하나 붙여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