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경호 시인(서북미문인협회 회장/워싱턴주 한미연합회(KAC) 이사장)
레드카드
어느
초대형 식품점에는 상품권으로 레드 카드와 화이트 카드가 있다. 레드 카드는 술과 담배까지 살 수 있지만
화이트 카드는 술과 담배는 살 수 없고 식품과 생필품 등만 살 수 있다.
50달러
짜리 화이트 카드 네 장을 샀다. 레드 카드 말고 꼭, 화이트
카드여야 한다고 해서다.
어느
중학교 선생이 코로나19 사태로 자신이 맡은 학년 중에 끼니를 잇기 어려운 가정들이 있다고 한다. 그 선생은 자신의 주머니를 털어 매주 50달러 짜리 화이트 카드를
사 그 가정들에 전하기로 했다.
처음에는 두 가정이더니 시작한 지 이 주도 안 돼 여덟 가정으로 늘어났다고
한다. 더 찾으면 더 많은 가정이 나 올 것이라고도 했다.
게다가
학교가 관심을 보이면서 어쩌면 전 학년으로 확대될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여기저기 작고 큰 기부행렬도
이어지고 직접 생필품들을 사서 기부하기도 한다.
코로나19로 인하여 많은 사람과 가정, 소상공인들이 어려움에 부닥쳐있다. 실업수당, 긴급구제기금, EIDL, PPP, SBA 융자 대납 등 생전 처음 들어보는 정부의 각종
지원방안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하지만 금액이 충분하지 않고 지급은 더디고 자금이 바닥나 받지 못하는
등 여기저기서 아우성친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이 아니라 온몸에 불이 붙은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다. 하지만 이 불을 끌 물 한 방울 구하기가 너무나 힘들다.
그래도
그나마 그 아우성이라도 칠 수 있는 사람들은 다행이다. 기댈 언덕이 있고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쥐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털어도 먼지 하나 나오지 않을 그 주머니조차 없는 사람들이 있다. 각종 지원금 중 어느 것 하나 신청할 수 없고 받을 수 없는 사람들. 주
정부에서 발급하는 식품보조카드마저 받을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코로나19로 외출금지령이 내려지면서 많은 사업체가 휴업이나 폐업에 들어갔다. 체류
신분상 이런 곳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현금으로 임금을 받아왔던 사람들은 당장 수입이 끊겼다. 그런데 그보다
더 막막한 것은 어디 하나 손 벌릴 데가 없다는 것이다.
축구 경기로 치자면 구제 대상에서 레드카드를
받은 사람들이다. 여기저기 외면당하며 구제의 사각지대에 내몰린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 선생은 지원할 대상을 정할 때 첫 번째 조건이 그 레드카드를 받은 가정이다. 아무리 어려워도 체류
신분이 보장된 사람들은 정부나 기관의 구제 라인 안에 들어있기에 많든 적든 지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레드카드를
받은 가정 중에는 화이트 카드를 줘도 장 보러 갈 교통편이 없는 가정이 있어 직접 식품을 사 전달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한다.
다행히도, 그 선생이 말한 가정 중에 한인 가정은 없었다. 그렇다고 우리 한인
중에 구제의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평소 한인들은 저축성이 강하기에 당분간 버틸
수 있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쉽게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 이미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한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마땅히 손을 내밀만한 곳도 찾지
못하고 또, 도움을 청하기에도 마음이 무거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우리 한인사회는 이런 한인이 있는지 유심히 살펴보아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자국민의 일자리를 빼앗기지 않겠다며 일시적으로 미국 이민을 중단시키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게다가
영주권 발급까지 중단하는 행정명령에도 서명했다. 이런 가운데 더 좁은 구석으로 몰릴 대로 몰린 한인들을
나라가 살피지 않겠다면 같은 민족이라도 살펴야 한다.
워싱턴주
정부는 이런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을 위한 지원책을 마련 중이라 한다. 한인사회는 구제기금을 모금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이런 기금들을 계획만 세우고 모금만 하고 있을 것인가! 언제 어떻게 누구에게 지급할지 빠른 논의와 집행이 필요한 시점이다.
코로나
대유행의 한복판에서 하루가 견디기 어렵고 한시가 급한 사람에게 내일, 내일 하는 것은 고문이다. 모금은 모금대로 계속해 나가면서 적소, 적기에 필요한 분들에게 서둘러
지원되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현 상황은 철저히 준비하여 잘 지급하려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더 늦기 전에 속도감 있게 지급하는 것도 중요하다. 숨넘어가는 사람에게 산소호흡기 끼워주듯…
현재, 정부나 기관들로부터 다양한 구제기금이나 혜택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우리가
그 지원을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한인사회의 재원이 되어 어려운 경제적 사태를 버텨나가고 코로나 사태 후 재기하는 데 고스란히 밑거름이 될 것이다.
하지만 많은 한인이 정보에 취약하고 언어장벽으로 인해 제때, 제대로
신청을 못하여 많은 혜택을 놓치고 있어 안타까운 현실이다.
가능하다면 분야별 전문지식을 가진 정부
공무원, 회계사, 변호사,
금융계 인사들이 앞장서 이런 지원을 쉽게 신청하고 받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으면 한다. 그
도움은 한인사회의 위기 극복과 재건에 큰 힘이 될 것이라 믿기에 전문인들의 지원을 간청드리고 또, 간청드려
본다.
조국
대한민국이 세계의 수많은 찬사를 받으며 코로나19를 극복해 나가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경이로웠다! 일치단결하여 슬기롭게 재난을 헤쳐나가는 한민족의 우수성과
자부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곳 우리 한인사회에서도 그 우수성과 자부심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될 것이라 믿는다.
모두가 코로나19으로
인하여 힘들고 근심이 깊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이
시기를 어떻게 대처하고 극복하냐에 따라 코로나19 대유행 후 우리가 맞이할 세상은 그에 걸맞게 달라지게
될 것이다.
물론, 세상도 제도와 문화, 풍습 등 그 이전과는 판이하게 달라져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달라진 세상에는 더이상 재난과 인명
앞에 레드카드가 없기를 염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