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완
경영학 박사(시인/화가)
새해에
다시 바라는 소망
다사다난(多事多難)했던 한 해가 저물어 간다.
이국 땅에서 눈을 반쯤 감고 사는 나, 더구나 정서적으로는 태평양 한 가운데 둥둥 떠서
사는 내가 느끼기에도 지난해는 유독 시끄러운 해였다. 도대체 엉덩이를 바닥에 붙이지 못하고 까치발로
서서 내일을 미리 기웃거렸던 게 아닌가?
서울에선
현 정권의 실정을 질타하는 시위사태가 거듭되었고, 탄핵과 헌재의 판결 그리고 뒤따를 정치국면의 향방이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북의 김정은은 시도 때도 없이 미사일을 쏘아대고 핵실험을 해댔다.
미국도 대선을 치르면서 디베이트에서 해프닝이 거듭되더니 예상을 뒤엎고 트럼트가 당선, 많은 투표자들이 당혹감을 아직 떨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트럼프의
백악관 입성으로 그렇잖아도 브렉시트(Brexit)를 기화로 일기 시작한 자국 우선주의적 세계 정세가
어떻게 변해갈지 귀추가 주목된다.
트럼프 당선자는 특히 북한의 비핵화 및 김정은 타도를 목적으로 대
중국압박 등 강력히 대처할 것을 천명하고 있어 앞으로 한반도 정세가 매우 우려되기도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로 인해 해묵은 통일문제에 일말의 실마리라도 찾게 되지 않을까 조심스레 점쳐보기도 한다.
시리아
내전이 막바지에 치열해지면서 애먼 피난민만 넘쳐났다. 지중해 해변에 어린 아이의 익사체가 매스컴을 타면서
세계는 경악했고, 주변국들이 난민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무슬림 난민들은 사우디나 이란으로 가지 않고 잘 사는 독일, 영국 등으로 메뚜기 떼처럼 몰려갔다. 난민들이 야기하는 각종 사회문제들, 심지어 손님대접을 제대로 안한다고
되려 큰소리치는 작태 때문에 유럽전역이 목하 불안에 떨고 있다.
매년
신기록을 달성하는 세계적 기후변화 문제가 국제회의 때마다 거론되더니, 효과적인 대안의 하나로 범세계적
단일 가버넌스 구상안이 회자되고 있다. 예컨대, 시애틀의
갑부 빌 게이츠도 몇 해 전에 그 필요성을 피력한 바 있었다. 이를 기화로 바티칸의 교황권이 강화되는
경향이 특히 눈에 띈다.
한국과
미국을 포함, 세계 경제가 여전히 불황의 늪에서 헤매고 있어서 호황에 길들여진 대다수 소비자들이 고통을
더 크게 느끼기 시작했다. 빈부격차가 심화되고 특히 청년고용문제는 세계적인 현상으로 고착되는 듯하다.
이미 20년 전에 J.
Rifkin교수가 예견했던 ‘노동의 종말 시대’가
눈앞에 벌어지고 있지 않은가. 비단 청년고용문제 외에도 세계는 지금 노인인구 증가, 민족-인종-종교간 알력
비등 등의 복잡한 문제로 테러와 각종 대형 범죄들이 속출하고 있다.
자살과 우울증 환자가 늘고 있는
것이 오히려 당연할지 모른다. 사회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강력한 공권력을 요구할 수 있겠으나 이는 다시
민권침해로 이어질 수 있으므로 쉽사리 풀 문제가 아닐 듯 하다.
변화의
폭과 깊이와 속도가 가중되는 환경에서 사람들이 이에 대처하는 능력이 태부족할 것이므로 불안감은 늘 수밖에 없다고 본다. 개인이나 기업, 정부 역시 변화를 정확히 예측하려면 폭증하는 정보를
효과적으로 처리할 수 있어야 하는데 한계가 있을 것이다. 이른바 변화관리 문제가 중요한 이슈가 되는
소지이다.
이같이
불안감의 먹구름은 더 짙어갈 것이다. 먹구름을 찢고 한 줌의 파란 소망의 빛이 비추어야 한다. 그래야만 여위어 가는 우리가 맑은 공기를 들이마시고 얼굴에 홍조를 띠게 될 것이다.
그 바람은 뭘까? 죽음이 아닐까?
그렇다, 차라리 죽어야 산다. 서로 목소리를
죽이고 욕구를 죽이고 격정을 죽여야 할 것이다. 가난하게 사는 방법을 교육하고 터득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남의 소리를 들을 수 있고 남의 욕구를 이해하게 되고 서로의 배를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죽일 수 있다면 우리는 더 안정되고 평화스런 사회에서 살게 될 것이다.
고(故) 신영복 교수의 ‘여럿이 함께’라는 글귀가 생각난다.
그렇다. ‘우리 함께’는 수단일 뿐만 아니라
목적이 되어야 한다. 우리 더불어 함께 잘 사는 사회가 되기를 오는 한 해에도 다시 바래본다. 아니, 내후년에도 바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