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진 목사(루터교 은퇴/미주크리스천 문인협회 회원)
목회자의 정체성
-독자가 보내온 서신을 읽고
한 독자로부터 받은 글을 소개하면서 목회자의 정체성(正體性)에
관해 언급을 하고자 한다.
“공급과 수요, 좋은 글 쓰셨네요… 참고로 인터넷에 떠있는 통계 한가지 적어드립니다. 현재 한국에는 170개 교단이 있고 비인가까지 합쳐 신학대학을 운영하는
교단이 100개, 그 중 한국 교회 연합 24개 교단이 운영하는 교육부인가 4년제 신학대학에서 1년에 졸업하는 졸업생이 3,788명이랍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들 신학대학에 지원하는 학생 대부분이 정규대학에 갈 자격이 없다는 것이지요. 수요와 공급은 단순히 숫자로만 따질 것이 아니라 질적인 면도 따져야 한다는 이야기지요.”
이 독자는 목회자 지망생이 너무 ‘수준 이하’라는
것을 지적하면서 목회자 양성에 있어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도 문제지만 수준이 떨어졌을 때 목회자의 자질이 가져다 주는 피해도 우려한 것이다.
자질이 부족한 목회자는 오염된 물이나 공기보다 더 공해가 돼 교회를 박제(剝製)화시키고, 교인은 이름만 걸쳐놓고 습관적으로 일요일에만 교회를 가는
‘Sunday Christian’으로 그치게 만들어 교회의 진로를 어둡게 하는 암적 요인이 된다.
이 독자는 목회자의 자질은 물론 정체성에 깊은 관심과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정체성이란 ‘변하지 않는 본질’을 의미한다. 쉽게
말해 본질이란 그것을 더욱 ‘그것답게’ 만드는 것이다.
나를 더욱 나답게 만드는 것들의 총합이 ‘나의 정체성’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답게’이다.
그러면 무엇이 나를 나답게 만들까? 성경의 본질이 되는 진리를 말하는 것인데 곧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
진리의 본질에 충성하는 것이 바로 크리스천의 소명이다.
사도 바울은 “내가 사도가 된 것은 사람에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아버지 하나님으로 인하여서 되었다”고 했다(갈라디아서 1:1). 이처럼
목회자는 반드시 자기 나름대로 다시 시작하는, 즉 거듭남의 전환점이 있어야만 한다.
필자는 1958년 한신대 졸업 직후 통역ㆍ법무ㆍ군종 등 특과장교 모집에 응시해 현재의 제3군 사관학교 전신인 육군 보병학교애 입교, 졸업해 육군 중위(군목)로 임관했고 이어 21사단으로
배속됐다.
그곳은 강원도 깊은 산골이라 춘천역으로 이어지는 버스 길은 산 중턱을 깎아 만든 험한 길이었다. 어느 날 버스를 탔는데 10살 난 소년과 자리를 함께하게 됐다. 이 험한 고갯길을 넘을 때는 승객마다 의자나 손잡이 등 뭔가를 붙잡고 혹시나 사고가 안날까 두려워하며 안절부절
한다.
헌데 이 소년은 일어나기는커녕 코를 골며 단잠을 자는 것이 아닌가. 소년을 흔들어 깨우며 손잡이를 붙잡으라고 권했지만 이 소년은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소년의 어깨를 힘주어 다시 흔들자 그는 귀찮다는 듯 일어나며 “아저씨, 아저씨는
몰라서 그래요. 이 버스 운전사는 저 아버지예요”라고 말했다.
필자는 이 말에 큰 충격을 받았다. 이 소년의 음성을 통해 하나님께서 “내가 바로 너를 다스리시고
주관한다”라는 분명한 메시지를 전해줬기 때문이다.
그 당시 버스에서의 경험은 내게 큰 소명감을 갖게 해준 도화선이 되었고 그 험한 언덕길은 바로 바울의 다메섹이 된 셈이었다.
소금의 본질은 짠맛에 있다. 소금이 짠 맛이 없다면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짓밟힌다. 목회자도 예외가 아니다. 목회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정체성을 확립해 사도 바울처럼 사람들에게 밟히지 않기 위해 예수께 잡힌, 그 소명의식에 젖어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에만 좇아가길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