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병두 목사
유진
중앙 교회(오리건주 유진/스프링필드 소재)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야채의 싱싱한 모습을 바라만 봐도 마음이
평화로웠습니다.
유학생들의 초창기 힘들었던 이야기와 일반 한인 이민자들의 삶의 애환을 함께 나누고
집으로 돌아오면 먼저 발길이 닿는 곳이 야채 밭이었습니다. 주인을 한결같이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매일 밤 달팽이를 잡아주고 세마리의 충실한 개가 사슴을 쫓아준 덕에 상추가 탐스럽게 자랐습니다. 자주 내리는 봄비로 부드러운 땅을 뚫고 싹을 틔우는 씨앗들을 보면 생명의 신비한 힘을 느끼곤 했습니다.
하지만
5월부터는 비가 오지 않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야채밭에 물을 줘야 했습니다. 1 에이커(1,200평)나
되는 넒은 밭에 물을 주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지하수 파이프에 스프링클러를 연결시켰습니다.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뿜어주는 물 덕분에 야채들은 여름 가뭄을 잘 견뎌냈습니다.
수확한 열무, 배추, 무, 파를 박스에 담아 교우들에게 선물할 뿐만 아니라 한인들과 유학생들에게도 나눠주는 기쁨은 재배하며 겪은 고달픔을
말끔히 씻어 주었습니다.
야채를 재배한지 5 년째
되던 여름 어느 날, 밭에 물을 주는 나에게 이웃집 백인 두명이 찾아왔습니다. 인사를 나눌 겨를도 없이 다짜고짜 물을 주지 말라고 했습니다.
뜻밖의
말을 듣고 당황한 나에게 그들은 아예 야채 밭을 더 이상 사용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내가 밭에 물을 너무 많이 줘서 자기들의 지하수가 고갈됐다는 것입니다. 이웃 브라운씨의 집은 우리집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함께
온 샘씨의 집은 훨씬 더 멀었습니다. 그럴 리가 없다고 말했지만 막무가내였습니다. 지나치게 무례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일 내가 백인이라면 이런
횡포는 부리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나는 차분하게 대답했습니다.
두 이웃의 지하수와 내 집 지하수가 서로 연결돼 있는지 여부를 시청에 문의한 후 그 결과에 따라 결정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밀어붙이지 못하고 내 제안에 동의했습니다. 담당
공무원이 세 집의 지하수 연결 여부를 판단하느라고 약 일주일간 부지런히 오갔습니다.
우리 집이 지하수를
쓰는 동안 두 이웃 집의 지하수 저장량이 줄어드는지 조사했고, 그 반대로도 조사했습니다. 열흘쯤 후 통보가
왔습니다. 지하수가 서로 연결됐다며 사용 우선순위를 결정하기 위해 각각의 가옥 건축 연도 및 우물을
판 허가 기록을 제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기록으로도 판정하기가 난감했는지, 아니면 너무 골치가 아팠는지, 그 공무원은 무승부로 판정했다는 통보와
함께 이웃간에 의논해서 조정하라고 권고했습니다.
나는 브라운씨와 샘씨를 만나 앞으로 지하수 사용을 최소한으로
줄이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달팽이나 사슴보다도 이웃집의 공격이 훨씬 더 집요하고 강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해 성탄절에 이웃이 됨을 감사한다는 내용의 성탄카드와 함께 초콜릿을 선물했습니다. 그 후 12월 31일
브라운씨가 손수 만들었다는 사과 잼을 정성스럽게 포장해 찾아왔습니다. ‘해피 뉴 이어’ 인사를 주고
받았습니다.
어느 날 외출 중에 브라운씨가 전화를 했습니다. 우리
집에 낯선 사람이 왔다갔다한다며 급히 와보라는 것이었습니다. 달려갔더니 내 친구 스튜어트씨가 놀러 왔다가
저를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이웃을 염려해준 브라운씨가 고마웠습니다.
그로부터 십오 년이 지난 어느 날 브라운씨는 타주로 이사 가게
되었다며 인사차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나를 그 길고 듬직한 두 팔로 허그하면서 나직이 말했습니다. “당신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 동안 고마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