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용근(John Lim) 전 오레곤주 5선의원
돈키호테
돈키호테가
풍차와 싸우는 것 같이 싸우고 노력해야 한다.
나는 1966년 6월 미국에 왔다. 한국에서
떠날 때 단돈 100달러를 가지고 청운의 뜻을 품고 미국에 도착했다.
그나마 서북미 항공편이 일본 하네다 공항을 거처 하룻밤 쉬고 오는 덕분에 가진 총재산 100달러를
주고 캐논 카메라를 사고 시애틀을 거쳐 포틀랜드에 도착했을 때는 무일푼이었다.
한국서 늘 없이 살았으니
뭐 이상할 것도 없었다. 날 때 빈손으로 왔고 미국에서 또 빈손으로 시작했다.
그래도
버스를 탈 잔돈이라도 있어야 했었는데 왜 그리 했는지 지금도 이해가 잘 안된다.신학교까지 가야 하는데
그야말로 야단이다. 기다리고 있던 참에 시내 버스에 온다. 그런데
버스가 기다리던 정류장에 서지 않고 그냥 지나쳐간다.
그래서 그 다음 정거장에 서나 보다 하고, 가는 버스를 뒤쫓아 뛰는데 차 안에서 학생들이 우스워 죽겠다고 야단들이다. 가만히
보니 노란 색깔의 스쿨버스를 쫓아 한참을 뛰고 나니 땀도 흐르고 민망 하기 짝이 없다.
그
이후 미국 온지 20년이 된 1985년. 오레곤주 한인회 회장 경선 선거에 역사상 전무 후무한 선거전이 벌어졌다. 수구냐
개혁이냐의 선거전이었다. 올해 회장은 내가 하고, 내년은
네가 하고 하는 식의 오레곤 한인회장 선거에 제동이 걸린 것이다.
수구파는
한인회 전직 회장단을 중심으로 이자승 후보를 내세웠고, 신개혁파를 중심으로 나를 후보로 내세웠다. 나는 “못 살겠다 갈아보자” 구호를
내걸고 연세대 철학과 출신 이천영씨를 중심으로 ‘한인회 정화위원회’를
구성해 치열한 선거전을 펼쳤다.
결과는
모두 1,100여표가 투료를 한 가운데 60%대 40%로 개혁파가 대승을 거둬 민주주의에 입각한 한인회가 탄생했다. 그때
내 나이 50이었다.
논어에
나이 50이면 지천명(知天命)이라 하였던가? 그때부터 세상에 눈뜨기 시작해 계속해서 오레곤 한인회장, 상공회의소 창립, 미주 한인회 총연합회 총회장, 미주 상공인총연합회 총회장에 이어 미주에서 당시 17개국 아시안을
대표하는 700만 ‘아시안 시민권 협의회’ 의장 등을 역임하고 미 주류 정계에 입문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우리
가족은 약 35년간 148가와 Halsey 근처에 있는 community church에 다녔다. 미국 사회를 알고 영어도 배우고 자녀들 교육을 위해서도 미국교회 다니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이민자에게 미국 사회를 배우는 데는 미국교회가 첩경이다. 나는 그
교회에서 집사도 하고 신도 회장도 하고 새로 교회를 건축하는 데도 힘을 보탰다.
교회
담임 목사는 James Estes 목사로 컬럼비아대학을 졸업한 학자로 훌륭한 목회자였다. 하루는 예배 후 친교시간에 사회와 정치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는 도중 Estes
목사가 갑자기 오레곤 주지사에 한번 도전하면 어떻겠냐고 나에게 물었다. “Why don’t you
run for governor?” 라고 말이다.
이
말 한마디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맘에 싹 트기 시작했다. 말 한마디가 ‘씨’가 되었다. 이 말을
들은 지 3년 만에 “ why not ?” 하는 답을 얻었다. 즉 1990년 봄에 오레곤 주지사에 출마하기로 결심을 했다.
3월
후보 등록 마지막 날에 가보니 나까지 모두 7명의 공화당 후보가 등록을 했다. 좀 모순된 이야기지만, 나는 당선 목표보다 첨에는 이름을 알리고
차기를 당선하고자 하는 전략으로 임했다.
꼭
당선을 위한 목적으로 선거전에 임했다면 맘 고생이 심했겠지만 정치를 배우고 차기를 보는 정치 현장이니 여유있게 선거전에 임했다. 그 당시 약 25만달러 정도를 나 자신을 알리는데 TV광고에 사용했다.
그리고 경험 많은 프리랜서 언론인을 고용하고
주류사회 미디어에 막강한 홍보를 시작했다. 내 계획은 적중했다. 사업과
사회의 경험은 있지만 미국 정치 경험은 전무했지만 미 주류 정치 일선에 뛰어들면서 살아 있는 정치교육을 배웠다.
이
소식을 들은 한인 언론사는 그 당시 나를 한국 신문에 ‘돈키호테’라고
표현했고, 그 별명이 처음으로 등장했다.미주 한국언론이 나를
‘돈키호테’라고 부르는 게 그리 나쁘지도 않았다.
풍차(Windmill)하고도 싸워야 했다. 풍차하고 싸워 이길 가능성은
없어도 한인사회에 정치적 바람(wind) 은 일으켰다. 그리고
미 정계에 아시안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그 결과 공화당 예비 선거 7명
후보 가운데 두번째로 표를 많이 받았다.
이로 인해 차기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차기에 하원의원으로 출마해 달라고 공화당 의회 의장한테 연락이 왔다. 나는
차기에 주 상원의원으로 출마하겠다고 선언했다.
내
선거 지역은 민주당 강세 지역이다. 상대 후보는 전 상원의원이며 현Metro 의원이며 또 잘 알려진 백인 여자 의원이었다. 나는 공화당으로 한인 1세 이민자, 영어도 신통치가 않았다.
학연ㆍ지연ㆍ혈연도 없었다. 또 지역 사회에 공헌한 바도 별로 없다. 그야말로 상대는 insider고 나는 outsider 였다.
그러나 1992년 상원 11지구 주상원 의원(Multnomah County)에 출마했다. 지역은 Gresham, Troutdale, Fairview, Wood Village, Non-Incorporated 지역을
대표하는 지역이며 인구 약 10만명, 약 3만호로 당시 현직 민주당 의원이 섬기는 지역구였다.
우리
부부는 1년간 매일 집집마다 3만호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문을 두드렸고, 선거 간판(lawn sign) 3,000개를
박았다. 10집마다 간판 하나 꼴이었다.
아주
간판으로 도배를 하였다. 많은 자원봉사자도 같이 도왔다. 그
결과 59대 41로 대승을 거뒀다. 이로써 한인 이민 1세로 미국 정치에 처음으로 주상원에 입성했다.
역사는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하는 사람, 도전하는 사람의 편이다. 정치는
똑똑한 사람의 편보다 믿고 행동하는 사람에게 문을 열어준다.
내
신념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꿈은 다 실현할 수는 없어도, 꿈이 없으면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고 믿는
것이다. .
나는
그런 의미에서 ‘현대판 돈키호테’라 불려도 부정하지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