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진 목사
(루터교 은퇴/미주 크리스천 문인협회원)
범사(凡事)에 그를 인정한다는 것
잠언에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고
했다. 범사(凡事)란 모든 일, 온갖 사사건건을 두고 하는 말이다.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하나하나 옳다고 믿고 따라야 할 일은
곧 하나님(테오스-θεος)의 존재를 인정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영어 낱말로는 ‘Acknowledge’라 하는데
‘진실임에 동의한다‘는 뜻이다. 로마서 10:9절에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했다.
믿음을 헬라어로 ‘피스티스(πιστις)’라 ‘확신하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페이토(πιστευω)’에서 왔다. 믿음이란 ‘먼저 내세우는 기본’을 뜻하는 전제(前提)와도 같다고 할 수 있다. 전제에는 조건이 따를 수 없다. 결론의 기초가 되는 판단이라, 이것 아니면 저것이고, 저것 아니면 이것이지,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되지 않는다.
백두산 꼭대기에 떨어지는 물방울이 두만강으로 흘러 내려가든지, 아니면 압록강으로 흐르든지 둘
중 하나인 것처럼 ‘나는 창조주의 피조물이 아니면 자연물이든지 둘 중 어느 하나가 되는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나무뿌리의 열매를 맺게 된다.
나무는 뿌리가 생명이라 뿌리가 죽은 나무는 자랄 수 없고, 결국 버려지게 된다.
성경이 우리를 가리켜 ‘불붙는 가운데서 빼낸 나무’(아모스 4:11)라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결국 죽어서 잘라 버려서는 안 될 나무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인정하면 어딘가에 묶여 있는 것처럼 속박(束縛)되는 것 같이 느껴질는지 모르지만
종국에는 구속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자유롭고 평화로워짐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하나님을 부인하면 자신이 최고 존재라고 자인하려 든다. 좋은 예가 바로 창세기11:1~9에 나오는 바벨탑 사건이다. 바벨탑을 하늘 꼭대기까지 쌓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자기들의 이름을 내자는 것이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아나니’란 말씀에서 보듯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관계가 깨어지면 ‘무(無)’에서 ‘유(有)’가 된 것을 알 수 없어 창조주와 피조물(被造物)과의 질서가 형성되지 않는다.
이럴 경우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고 할
수가 없게 된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고백 속에는 하나님을 인정해야만 하는 전제가 따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것을 인정하지 않을 경우
우리는 자신의 존재를 자연 속에서만 찾으려고 헤매게 된다. 어쩔 수 없이 자신을 우주의 부속품 혹은 자연의 부산물, 또는 동물 중의 하나로 여기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화론적 사고인데 이는 인간이 최고이며 진리는
인간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생각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다는 판단도 인간 자신이 결정하며 자신들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 세우려
든다. 이 같은 사상은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한다는 탈을 쓰고 수많은 사람들을 미혹하기도 했고 지금도 끊임없이
미혹하고 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와 조물주 관계를 옹기장이와 진흙과의 관계로
설명하고 있다. 우리를 빚어 나가다가 제대로 안되면 그 흙으로 다른 그릇으로 다시 빚는 권한이 옹기장이의 손에 달려 있다고 본다.
그것이 바로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인 것이다. 주인의 재산을 청지기에게 맡기고 관리케 하는
주인과 청지기와의 관계도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를 잘 설명해주는 좋은 예이다.
우리가 비록 소우주이긴 하지만
대우주인 오대양 육대주에 퍼져 살면서 이 모든 자연 만물을 다스리고 관리할 책임을 맡아 자기의 의무를 다하지 못할 때 주인으로부터 책망을 듣게
된다고 성명은 말한다. (누가복음 16:1~13). 그러기에 우리는
이곳에 보내심을 받은 자로서 보내신 자의 뜻을 좇아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dongchingkim@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