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돈하 목사/오리건 벧엘장로교회 담임
칠면조 값이 올라가고, 국내선
비행기 티켓이 동이 나는 계절. 집집마다 호박파이를 구워내고, 온
가족이 모여 풍성한 식탁을 차려놓고 이야기 꽃을 피우는 날. 이것이 미국에서 흔히 느낄 수 있는 추수감사절의 정취입니다.
하지만 추수감사절은 처음부터 이런 분위기였을까요? 첫 번째 추수
감사절을 주관했던 윌리엄 브래
드포드 총독이 썼던 한 편지를 보면,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의 편지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너무나 슬프고 애통한 사실이 있습니다. 두 세달 동안, 특히 1월과 2월의 혹독한 겨울날씨 속에서 집이 없고 몸을 피할 곳이
없어서, 또 한편으론 긴 항해와 열악한 환경이 불러온 괴혈병 등의
질병으로 인해서 그 사람들 중 절반이 죽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절반이라는 말은, 신앙의 양심을 지키고 오직 말씀에 따라 하나님을 예배할 자유를 얻기 원했던 102명의 청교도들의 절반이라는 뜻입니다. 이 102명은 타락한
영국교회의 탄압을 피하여 네덜란드로 갔다가, 그 곳에서도 뜻한
바를 이룰 수 없어 다시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망명길에 올랐고, 65일간의 항해 끝에 1620년 미국
동부의 플리머스(Plymouth, 현 매사추세츠주)에 도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 절반이 첫해 겨울도 넘기지 못하고 혹독한
날씨와 질병으로 인해 죽어갔던
것입니다.
이듬 해인 1621년 봄, 살아남은
이들은 눈물로 씨앗을 뿌리며 농사를 지었고, 이윽고 가을이 되었습니다.
플리머스 총독 윌리엄 브래드포드를 비롯한 살아남은 50여명의 청교도들은 3일 동안 한 자리에 모여 신앙의 자유를 행사할
새 땅을 주신 주님, 풍성한 수확을 거두어 살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이때의 감사는 마지못한 감사가 아니라, 함께 왔던 사랑하는
가족과 동료 신자들의 절반을 잃은 혹독한 환경 가운데에서도 자신들을 그 땅에 심어주시고 먹을 것을 공급하신 하나님께 대한 참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고백이었던
것입니다.
이 자리에는 주변의 인디언들도 함께 했는데, 그것은 그
인디언들이 농사를 위해 곡물을
제공해 주고 농사 방법을 가르쳐
주는 등 큰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후로 매사추세츠주에서 이날을 기념하여 추수감사절로 지키게 된 것은 물론, 사람들이 이주함에 따라 뉴잉글랜드 전역으로
퍼져 나갔고, 1789년에는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전국적인 행사로, 1863년에는 다시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이 공식적인 국경일로 선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추수감사절은 신앙의 자유를 주신
하나님, 풍성한 수확을 주셔서 살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날이며, 이 나라가 처음부터 하나님의
은혜로 세워진 나라임을 선포하는 날입니다.
추수감사절의 기원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최초의 추수감사절을 보낸 사람들의 감사는 가벼운
감사가 아닌 ‘깊은 감사’였습니다.
깊은 감사는 모든 조건이 완벽하기 때문에 나오는 감사가 아닙니
다. 어려움 중에도 나를 사랑하시고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최초의 추수감사절 예배를 드렸던 청교도들과 같이 장미꽃뿐만 아니라 장미꽃 가시도
감사하는 ‘깊은 감사의 달’이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