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호(한국문인협회 워싱턴지부 회원)
종북(從北)이라는 말
반세기를 훌쩍 뛰어넘는 60여년전인 1952년의 일이다. 그 해 여름 당시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나는 하교 길에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지서 앞을 지나 오는데 10여명의
사람들이 지서 앞 마당에 모여 무언가를 에워싸고 웅성대는 것을 보게 됐다.
어린 나는 호기심으로 다른 아이들과 함께 가까이 다가가 어른들의 틈을 비집고 안쪽을 살펴보니 흰 무명 바지
저고리 차림의 건장한 남자가 나무 벤치에 포박을 당한 채 고개를 숙이고 있지 않은가.
머리와 수염은
자른 지 오래인 듯 초췌하기 이를 데 없고 어깨에는 따발총이 거꾸로 메어져 있었다. 궁금증이 더해진 나는
다섯 살이 더 많은 동네 형에게 연유를 물으니 그는 “빨갱이야!”라고 귓속말로 일러준 뒤 시종일관 그쪽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6ㆍ25전란 직후 내가 살던 울산에도 사회질서가
어수선하긴 마찬가지였다. 그 당시 미처 월북하지 못한 소수의 빨치산 잔당 세력들이 규합해 깊은 산에
숨어 생활을 하면서 밤이면 근처 마을로 내려와 곡물과 닭 등을 탈취해 가는 일이 자주 벌어지곤 했다.
그럴 때마다 라디오나 신문을 통해 ‘빨갱이’출몰을 알리는 톱뉴스가 전해졌고, 이로 인한 민심의 소란은 그 후 오랫동안 그치지 않고 계속됐다.
그 때 어린 나의 마음에는 어른들이 들려주는 ‘빨갱이’실체에 대해 생각하기를 몸 전체가 빨간색을 가진, 무엇인가 알 수 없는 혐오감을 가져다 주는
것쯤으로 여기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 당시 공산집단이나 추종 세력에 대한 적대심과 공포심은 사회전반에 주요 이슈로 자리매김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북한 김일성 집단이 일으킨 6ㆍ25전쟁이 가져온 잘못된 편견과 해석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영문도 모르고 줄서기를 했다가 집안 전체가 낭패를 당하기도 했고 사회 진출에
발목이 잡히는 등 국가와 사회전반에 적지 않은 화를 당하는 시절도 있었다.
여기에다 이념사상을 내세운 정쟁의 혼란은 꺼질 줄 모르는 불씨로 남아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 몫을 톡톡히 해왔던 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이었다.
이런 아픈 과거가 있었는데 지금은 어떤가. 국어사전에도 없는 ‘종북’, ‘종북주의’라는 애매모호한 신조어가 탄생해 아무
때나 사용되고 있다. 신무기(?)라고 할 수 있는 이 단어는 정확하게는
북의 체제를 고수하는 집단이나 개인에게만 제한적으로 사용돼야 한다.
그런데도 ‘종북’이라는 말뜻의 중심에는 분명 북녘 전체를 아우르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몸과 마음이 가혹한 울타리 안에 갇힌 채 살아가고 있는 북녘의 우리 부모 형제들까지 모두 ‘종북’의 범주에 포함돼 사용되고 있는데 이건 분명 아니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영달과 당리당략에 눈이 멀어 아무 말이나 가리지 않고 해도 된다는 어처구니 없는 행태의 소치로 여겨진다.
한때는 영호남 편가르기로 불필요한 체력 소모전을 펼치더니 이제는 ‘종북’등으로 싸잡아 부르며 소모전을 펼치는 모습이 너무 안타깝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의미라도 명확하게 예전처럼 ‘빨갱이’나 ‘적색분자’로 불러 싸움질을 하는 편이 옳다고
느껴진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라는 아픔을 후세에 물려주지 않고 통일된 대한민국을 유산으로 물려주기 위해 이젠 진보와
보수를 떠나 국가와 국민만을 위한 정치 철학을 실천해주길 바란다.
갑오년 새해에는 낡고 찌들어 냄새 나는 헌 옷을 과감하게 벗어 던지고 밝고 쾌적한 새 옷으로 갈아입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