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진 목사(루터교 은퇴/미주 크리스천 문인협회원)
교회에 대한 바른 이해
본질적 의미는 항상 겉에 있지 않고 깊숙한 속에 묻혀 있다. 교회를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도 묻혀
있어 보이지 않는 의미를 찾아내야만 한다.
히브리어로 ‘카할(Qahal)’이란 낱말이 있는데 뜻은 ‘모임을
위해 부르다’이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불러 광야를 거쳐 가나안으로 인도한 것처럼 우리 또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는데 이 ‘카할’과 맞물려 ‘에다(Edah)’란
낱말이 있다.
이 낱말은 히브리어로 ‘지정된 일정한 장소에서의 모임이나 집회’를 뜻한다. 이 모임이 지금의 교회를 이해하는데 그림자처럼 뗄래야 뗄 수 없는 의미가 있다. 그림자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물체가 따른다.
이 그림자가 이면적인
것이라면 그 물체는 표면적인 것이 된다. 그러기에 이 둘 사이는 항상 함수(函數) 관계가 성립된다.‘X’란
변수의 변화에 따라 ‘Y’가 일정한 법칙으로 변화하게 된다.
이스라엘과 우리와 관계를 따져보면 이스라엘을 ‘X’라 한다면 우리는 ‘Y’라 하겠다.
이것을 로마서 2:28~29에서는 ‘표면적 유대인‘과 ‘이면적 유대인‘이라고
했다.
우리가 ‘이면적 유대인’이 된 것은 이스라엘 민족은
스스로 택함을 받은 민족이라 자부하며 교만에 빠져 있었다. 물론 택함을 받은 민족이 틀린 말은 아니다. 헌데 택함을 받은 사명을 다 하지는 못했다.
하나님이 최고 상품인 포도나무(이스라엘 민족)를 애굽에서
건져내어 가나안으로 옮겨 심었지만(시편 80:8~9) 기대와
달리 들포도만 열리고 말았다(이사야 5:2). 바로 그 들포도가
지금 중동의 이스라엘이다.
그러기에 다른 씨를 주셨는데 이 씨가 바로 ‘이면적 유대인’에 해당하는 성도들이고 그게 바로 우리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가 베푸는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은 새로운 영적 이스라엘이 됐기 때문이다(에베소서 1:7).
바로 이 은혜에 보답해야 하는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 이 책임이 교회를 통해 이뤄져야만 한다. 교회의 사명이 바로 이 일을 감당해 내야만 하기 때문이다.
‘교회’란 낱말의 뜻은 헬라어로 ‘에클레시아(εκκλησια)’라 하는데 ‘에크(εκ)’란 말은 ‘Out of(from)’란 뜻이고 ‘클레시아(κλησια)’는 ‘부른다’의 뜻을 가진 동사 ‘칼레오(καλεω)’에서 왔다.
한마디로 ‘안에 있는 사람들을 밖으로 끄집어낸다’는 뜻이다. ‘불붙는 가운데서 빼낸 나무 조각들이 우리임’을 성경은 가르쳐 주고
있으며(아모스 4:11), 잡혀 있는 자에게 이르기를 나오라
하며, 흑암에 있는 자에게 나타나리라(이사야 49:9) 했다.
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반드시 찾아오는, 결국 자기 한계를 극복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이다.(전도서 3:1-2) 부두에 정박해 있는 배들이 밧줄에 묶여 있듯
우리 또한 언젠가는 하직(下直)해야만 하는 제한성에 매여
있다(전도서 3:2~8).‘묶여 있다’는 뜻은 히브리어로
‘차라르(Tsarar)’라 하는데 꼼짝 못하도록 구속(拘束)돼 있음을 말한다.
이 속박으로부터 풀어주어 해방하는 일을 해내는 것이 바로 교회이고 이 사명을 다 하기 위해 교회 강단에서 전해지는 설교는 반드시 우리 모두가
흑암의 권세하에 있음을 깨우쳐 줘야 한다.
그 누구도 해낼 수 없는 막강한 권세 하에 있는 우리를 끄집어내어
그의 사랑, 아들의 나라로 옮기는 말씀이 반드시 선포돼야 한다. 찬송가 262장에 “어두운 죄악 길에서 목자 없는 양 같이 모든 사람 길찾아 헤맨다,
자비하신 하나님 독생자를 보내사 너를 지금 부르니 오시오 이때라 이때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