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근 목사(시애틀 빌립보장로교회 담임)
죽어도 다시 산다면!
20세기 프랑스를 중심으로 ‘행복론’을 설파하며 신선한
사회적 변화를 만들어나갔던 철학자가
한 사람 있었다. 바로 장폴 샤르트르였다. 그는 프랑스의
대표적 실존주의 철학자였으며 또한 사상가이며 작가이기도 했다.
그는 196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됐으나 스스로 거부한
특별한 인물이었다. 그러한 그가 인생 마지막에는 폐수종이라는 병으로 입원을 했는데 그 고통이 얼마나
극심했던지 주변의 모든 집기들을 집어 던지며 주변 사람들을 향해 온갖 욕설을 퍼부었다.
평소에 그렇게도
행복론을 설파했던 그가 인생 말년에는 그토록 비참하게 돌변해 말할 수 없는 고통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자 프랑스 매스컴들이 일제히 그를 비난하며
떠들기 시작했다.
어떤 이는 “그는 돌아갈 본향이 없었기 때문이다”고 샤르트르를
꼬집었다. 과연 그랬다. 그는 인간 이성으로는 행복론을 주장했으나
누구나 가야 하는 마지막 순간에는 돌아갈 곳이 없었기에 그렇게도 비참한 고통 가운데서 이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독일 루터교회 목사이자 신학자였던 디트리히 본훼퍼 박사는 나치에 항거하다 체포돼
감옥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는데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행복하고 평안하게 생을 마감했다.
그는 자신을
처형하기 위해 데리러 온 간수를 앞에 두고 함께 수감생활을 하던 동료들에게 이렇게 고별인사를 했다. “친애하는
여러분, 이제 제가 떠나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잠시
후 우리 또 다시 만납시다!” 그리고는 찬송가를 부르며 가족이라도 만나러 가는 사람마냥 행복하게 떠나갔다고
한다.
무엇이 이 두 사람의 마지막을 이렇게도 극명하게 갈라놓았을까요? 그
것은 오직 단 하나 믿음이었다. 사람이 사는 것이 이 땅에서만이 아니라 죽어도 다시 살아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영생복락을 누릴 수 있다는 확신과 믿음은 죽음을 그다지 두려워하지 않게 만드는 것이다.
샤르트르처럼 행복론을 외치고 행복하게 살자고 호소한다고 행복을 누리는 것이 아니다. 행복이란 고도의 믿음과 신념과 확신이 있을 때 스스로 누리는 결과론적 부산물이기 때문이다.
4월은 부활의 계절이다.
4월 1일이 바로 우리들을 위해 처절하게 죽으시고 우리들을 위해 또 다시 영광스럽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기리는 부활절이었다. 사람이 죽으면 다시 살 수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공감하지 못한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주변에서 그 누구도 그 같은 놀라운 체험을 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육신의 한계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 범인들은 경험하지 못한 것들은 믿으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 주변에는 경험하지 못한 진리들이 엄청 많이 있다.
남자를 모르는 처녀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아들을 잉태한 마리아가 그렇고, 굶주린
사자 굴속에 던져졌던 다니엘이 거뜬히 살아 돌아온 사건이 그러하며,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느브갓네살
왕의 노여움을 사고 일곱 배로 뜨겁게 한 풀무불 속에 들어갔으나 타죽지 않고 도로 살아나온 사건이 또한 그렇다.
하나님은 그래서 이처럼 실제로 경험하지 못해 믿지를 못하는 부활사건을 씨앗으로 비유하여 설명해 주셨다. 콩을 심었는데 그 콩은 땅속에서 썩어져 없어지고 콩나무가 자라나 심고 썩어버렸던 바로 그와 꼭 같은 콩이 열리는
것을 설명해 주셨다.
이 같이 사람도 죽어서 썩어져 없어진 것 같으나 하나님은 또 다시 살려내시고 전에
죽었던 사람과 똑 같은 사람을 만들어 내실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 우리들에게 믿음이 필요한 것이다. 똑 같은 사람이 만들어 놓은
스마트폰도 다 이해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하늘의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다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지금 우리들에게 꼭 필요한 것은 죽어도 다시 살 수 있다는 믿음인 것이다. 평생 행복론을 설파하고 정작
자신은 불행하게 세상을 떠났던 샤르트르 같이 인간은 어쩔 수 없는 미완성품이기에 절대자이신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 것이다.
부활의 복된 계절에 영육간 삶에 진정한 부활과 생명이 가득하시기를 축원드린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