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준
장로(칼럼니스트)
“나”의 진가(眞價) 발견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똑 같은 두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아마 그 누구도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 같은 사람은 1명도 없기 때문입니다.
얼굴 윤곽이 비슷해 보여도 자세히 보면 이목구비가 각기 다르고, 이목구비는
닮은 것 같은데 체중이나 신장이 다릅니다. 걸음 걸이도 다르고 발걸음 소리 또한 같지 않습니다.
그 뿐
입니까? 음성은 또 어떻습니까? 음성은 물론, 음성과 관계가 있는 웃음소리까지도 같은 사람이 없습니다.
이렇게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 인체의 내부를 비교해 본다면, 외형에서 보다 더 다양한
차이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보통 ‘간이 크다’느니, ‘심장이 두텁다’느니, ‘다혈질’이라느니 하는 말을 합니다마는, 위장이나 간장 등 여러 기관들이 사람에 따라 그 모양과 크기와 무게와 질에서 같지 않습니다.
사람의
성격은 또 어떻습니까. 각 개인의 성격도 외형만큼이나 천차만별입니다.
우리가 ‘개성’을 말할 때는 바로 그 내적인
성격의 특이성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마다 품고 있는 욕망도 다르고 취미와 소질과 능력이 다릅니다. 그 밖에도 기억력ㆍ시력ㆍ청력ㆍ취각ㆍ미각ㆍ피부색ㆍ체력ㆍ판단력 등에 있어서 꼭 같은 사람이 없습니다.
어느 가정의
쌍둥이 형제가 어찌나 똑같이 닮았던지 식별하기가 어려워서 그 어머니에게 집안에서는 그들 두 형제를 구별하는데에 얼마나 어려움이 많겠느냐고 하자
그 어머니는 “뭘요, 제 눈에는 완연히 다른걸요”라고 하더랍니다.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그들이 똑같아 보여도 부모의 눈에는 완연히 다른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너무나 상식적인 인간의 상이점을 장황하게 열거하는 이유는, 창조주께서
지금까지 수 백, 수 천억의 생명을 보내셨지만 그 어느 누구 하나 같은 사람이 없는, 완전히 다른 고유한 존재로서의 가치를 우리 각 개체에게 부여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세상에 단 한 명이라도 똑같은 인간이 있음으로 해서 그 존재의 가치가 조금이라도 희석되어지는 그런 불완전한
창조가 아니라 수 백억의 인간이 계속 태어나도 그 어느 누구하나 각기 타고난 고유의 가치가 털끝만큼도 절하되지 않을 만큼 놀라웁고 완벽한 창조의
능력과 신비와 사랑 앞에 오직 감탄할 뿐입니다.
우리들
가운데는 간혹, “나 같은 사람쯤”이야 이 세상에 얼마든지
있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을 어떤 공통된 집단 속에 합류시켜버리려는 그릇된 사고에 빠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창조주께서는 나와 같은 사람은 나 하나 밖에는 세상에 보내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내가 귀한 존재이고
그래서 하나님은 나를 그토록 소중히 여기시고 사랑하시며 예수님도 한 사람의 생명은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을 만큼 고귀하다고 가르치셨고 실제로
‘나’라고 하는 천하보다 귀한 존재를 구원하시려고 십자가까지
지시지 않았습니까.
우리 인간의
잘못된 판단으로는 높은 사람 낮은 사람, 귀한 사람 천한 사람으로 차별을 할 지 모르지만 ‘나’를 이 우주에 단 하나밖에 없는 진귀한 존재로 여기시는 창조주에게는
우리 모두가 평등할 수 밖에 없고 그의 관심과 사랑은 누구에게나 똑같을 수 밖에 없습니다.
같은 피조물인
우리 인간의 눈으로 보아도 높은 참나무는 시원한 그늘을 드리워서 귀하고, 포도나무는 맛좋은 열매를 맺음으로
소중하고, 길가의 작은 제비꽃은 예쁘고 아름다워서 사랑스러운데, 그것들을
직접 창조하신 조물주에 있어서야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하찮은 초목도 그 어느 하나 무의미하고 무가치하게
나고 자라는 것이 없거늘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우리 인간은 말할 것도 없지 않겠습니까? 천부께서는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머리털까지 세신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 조금도 과장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감히 그 어느 누구에겐들 우리가 소홀히 대하는 죄를 저지를 수 있겠습니까? 어찌 나 자신을 스스로 경시하는 과오를 범할 수가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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