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진 목사(루터교 은퇴/미주크리스천 문인협회원)
두 아들의 경우
아버지가 두 아들을 불러놓고 다짐을 한다.
먼저 맏아들에게 “너는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해라”라고 한다. 아버지의 말씀에 큰 아들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기다렸다는
듯이 “예”라고 대답을 한다. 아버지는 이 아들의 답변에 만족해한다.
이어서 둘째 아들에게도 똑같은 말을 한다. 이에 둘째 아들은 “싫습니다. 가지 않겠습니다” 라고 대답을 한다.
첫째 아들은 긍정적인 답변을 했고, 둘째 아들은 부정적으로 답을 한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아버지가 포도원에 가보니 실제로 행동은
너무나도 판이했다.
“예”라고 답했던 맏아들은 포도원에 없었고, “가지 않겠다”고 답을 했던 둘째 아들이 포도원에서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21:28~32절에 나오는 이 두 아들의
경우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가져다 준다.
첫째 아들은 아버지께서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라고 했을 때 아버지 말씀에 순종함으로 인해 오는 특별한 이익을 생각했던 것이다. 맏아들이니 아버지 비위를 거스르지 않고 내 몫의 유산과 그 밖에도 차지할 몫을 염두에 두고 그 같은 대답을
했다.
마음은 비둘기 마음처럼 콩밭에 가 있었지만 우선은 “예
가겠습니다”라고 대답해 두는 것이 지혜로운 처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곤 대답과 달리 포도원에 들어가 일하지 않고 자기 본심대로 행동하고 말았다.
둘째 아들의 경우는 정반대였다. 아버지로부터 일할 것을 당부 받았을 때 그는 마음속으로부터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게 됐다. 만일 쉽게 “예”라고 대답하고 실천하지
못하면 포도원 일은 어떻게 될 것인가를 고민했다. 차라리 말로만 하는 것보다는 행동으로 내 책임을 다하는
것이 ‘자식의 도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두 아들의 이야기를 통해 이질적인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권리를 중요시하는 맏아들의 사고방식과 권리보다는 의무를 더 중요시하는 둘째 아들의 사고방식은 하늘과 땅 차이만큼 크게 다르다. 첫째 아들은 수단과 방법에 비중을 더두어 권리행사를 중요시했지만 둘째 아들은 권리행사보다는 자기의무를 더 중요시했다.
30절을 보면 둘째 아들은 가지 않겠다고 대답한 것이 후회가 돼 뒤에 뉘우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아버지 말씀을 거역한 것은 실은 아버지의 명령을 따르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식의 의무를 더 깊이 생각하고
한 짓이었는데 아버지께서는 부정적인 답변을 들으시고 나를 얼마나 불효자식이라고 생각하셨을까? 라며 애타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행동보다도 말이 앞서기가 쉽다. 영어에서도 떠벌리는 사람을 가리켜 “그는 큰
입을 가진 사람(He has a big mouth)”라고 말한다. 말은
하기가 쉬운 것이기에 그 멍에도 가벼우며 행동은 무거운 것이기에 그 멍에도 무겁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보다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지만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고 행동을 통해 그를 따르기가 어려운
것도 같은 이치이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첫째 아들과 같이 가겠다고 대답하고도 가지 않기도 하고 둘째 아들처럼 안 가겠다고 하고서도
가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인간으로서
고민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도 “오라, 나는 괴로운 사람이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라고 탄식하기도 했다. 이 같은 탄식이 문제가 될 수는 없고 이런 탄식이
없는 것이 오히려 문제다. 무거운 책임감에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 “아니요”라고 대답했지만 실제로는
행동으로 옮긴 둘째 아들처럼 살아가는 크리스천의 삶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