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성모(전 오리건주 포틀랜드 시장 후보)
100년의 아픔
세월은
가는 것이 아니라 쌓이는 것이라고 한다. 시간은 흘러 가지만 역사는 물에 침전물처럼 가라앉아 우리 기억에
쌓이는 거라고.
내년도
달력을 받아 새겨져 있는 2019년이란 연도를 보며, 우리
민족이 나라 없는 설움에 울부짖던 3ㆍ1운동이 일어난 지 100 년이 되는구나하고 생각을 하니 목이 메이고 가슴이 아파왔다.
손톱, 발톱을 뽑아도, 손가락, 다리를
부러뜨려도, 면도칼로 귀, 코를 깎아내도, 달군 쇠로 지져내는 고통도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다고 울부짖던 유관순
열사!
18살
나이에 당차게 독립을 부르짖던 유 열사는 고문으로 자궁과 방광이 파열되어 순국을 했고 일제는 그들 만행을 숨기느라 시신을 난도질해 임종한지 2주일이 지나서야 이화학당에 인계됐다고 한다.
유관순
열사 외에 꽃다운 나이에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고 체포가 되어 강간을 당하고 무참히 죽은 소녀들이 전국 각지에 또 얼마나 많았을지… 나라를 잃어 고아들처럼 누구 하나 편들어줄 사람 없는 암흑의 세상이었다.
일제는
수원 제암리에서는 독립만세를 불렀다는 이유로 동네 남녀노소 모두 30여명을 교회에 가두고 불을 질러
태워 죽이기도 했다. 3ㆍ1운동으로 7,509명이 사망을 했고 1만5,961명이
상해를 입었으며 4만7,000여명이 구금되는 범국민의 무저항
운동이었다. 일제에 극심한 탄압과 무자비한 제압으로 여러 곳에서는 무력항전으로도 이어졌다.
4년
후인 1923년 9월 1일, 일본 관동지방에서 대지진이 일어났다. 점심식사 시간이어서 불을 피우고
있었기에 여기 저기 대화재로 이어졌으며 도쿄, 요코하마에 60여만
가옥들이 파손되고 40여만명이 사망, 행방불명이 되었다.
청일전쟁과
노일전쟁을 지휘하며 승승장구하여 , 육군대장으로 수상이 된 야마모토는 지진 상황수습으로 또 수도권에
조선인을 줄이는 방법으로 “조선인들이 방화를 하고 폭동을 일으킨다”,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약을 타서 일본인들을 독살한다” 라고 가짜 뉴스를 퍼트리고 군대와 경찰을 동원했다.
극우
일본인들은 ‘자경단’을 조직하여 죽창과 일본도로 무장을 하고
조선인들을 만나는 대로 찌르고, 베고 학살을 하여 6,600명이
실제로는 1만 명 이상이 아무 연고 없이 무참히 죽어갔다. 그
중에는 임신부들도 있었는데 조선인 씨를 말려야 한다며 태아까지 죽창으로 찔러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것뿐이었겠는가? 극악무도한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우리 조선인들을 강제 노동으로 700만명을, 그 중에 200만명은 일본으로 강제 연행하여 중노동을 시켰다. 지시마 열도에서는 기밀을 유지해야 한다는 이유로 공사가 끝나자 조선인 5,000여명을
몰살시켰다.
젊은 남자들은
군인으로 차출하여 37만명을 죽음으로 몰았고, 젊은 여성들은
위안부(일본군인을 위한 성노예) 16만여명이 동원되어 죽음보다
못한 삶을 살다가 더러는 생매장을 당하고, 총살을 당하고 말았으니 전 국민에 4분의1이상이 고통을 받은 셈이며 가까운 가족 중 희생자가 없는 집이
거의 없었다.
이역만리에서
고향 하늘을 그리다 목숨을 잃고 구천을 헤매는 동포가 200만명이상이라하니 이 어찌 슬픈 일이 아닌가?
일본의 731부대가 만주에 1942년부터 일본이 항복을 할 때까지 있었다. 마루다(막대기라는 뜻)부대라
별칭된 이 부대는 최소 3,000명에서 1만여명을 생체 실험을
하여 죽게 만들었는데 전쟁포로와 독립군들이 주로 실험대상이었다.
한
독립군 가족은 수조에 엄마와 아기를 잠수시켜 죽을 때까지 관찰을 했으며, 독립군은 숨을 거둘 때까지
피부를 도려내 온 가족을 몰살을 시키기도 했다.
그들은
매독 주사를 주어 매독으로 어떻게 죽는가를 실험을 하기도 하고 눈에 색료를 집어넣기도 하고 내장을 마취도 하지 않고 꺼내 실험을 했다. 페스트 균을 뿌려 어떻게 감염이 되고 어떻게 죽는지 실험을 한 비인간적인 부대를 운영했다.
1945년
해방이 되어 귀향의 꿈을 안고 귀국선에 오른 9,000여명의 노동자를 실은 우키시마호를 교토 마이즈루만에서
폭파시켜 8월21일, 7,500여명을
수장시키는 일도 있었다. 콩깨묵과 바닷물에 끓인 고구마 넝쿨국으로 연명을
하며 고된 노동을 하던 그들에게 무엇이 더 필요해 목숨까지 앗아가야 했는가?
그들은 누구의 사랑하는
아들이고, 누구의 사랑하는 남편이며, 우리 형제의 아버지들이었다. 하늘이 울고 땅이 소리질러 만방에 알릴 천인공노할 일이 아닌가? 일본은
언젠가 이 땅에서 꺼져버리고 말아야 할 상상할 수도 없는 죄를 우리 동포들에게 지었다.
토인비는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단언을 했다. 그러나 그 망국의 설움과 제압에서 당한 100년의 아픔이 아직 우리
가슴 속에 생생하게 있건만 우리에게 오사카 먹방여행, 일본 온천여행이 인기가 있어 단체로 다녀온다고
한다.
너무도
가슴이 아프고 슬픈 이야기이다. 그 후손들이 일본을 가보니 일본이 훨씬 깨끗하고, 음식도 담백하고 인심도 좋더라는 말을 어찌 할 수 있단 말인가?
렉서스
일제 차가 좋은 차로 평판이 나있더라도 ‘100년의 아픔’을
간직한 우리가 렉서스를 사서 일본을 경제대국으로 만드는데 일조를 해서야 되겠는가? 누구는 다 지난 옛일을 기억해서 우리 발전에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반만년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가지고 있고 우리의 역사를 우리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민족이 아닌가? 어느 하나, 작은 것에라도
우리 민족의 혼을 말살하려던 일본에게 유익을 주지 말고 일치 단결하여 우리의 의지를 보여야 하지 않을까?
우리
민족이 단결하여 우리의 저력을 보여 독도가 우리 땅이라고 주장하는 일본에게 조금도 틈을 보이지 말아야 한다.
일본은 1840년부터 정한론, 즉 한국을 정복하자는 의견이 나와서 착착 진행해왔고, 우리는 서로 싸우느라 그들의 간계를 알면서도 나라를 지키지 못했다.
100년의
아픔을 다시 한번 느끼고, 우리 민족은 서로 양보를 하고 단합을 하고,
우리의 마음을 굳건히 하여 일본을 능가하는 우리가 되자.
마지막으로
창씨개명을 이야기해야겠다. 1940년 2월부터 우리 민족은
모두 일본 이름으로 변경하라는 칙령에 따라 그 해 8월까지 80%가
이름을 바꾸었다.
공식석상에서는
일본말을 해야 했으며 신사참배를 강요 당했다.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불령선인으로 인정이 되어, 자녀들이 학교 입학도 할 수 없었고, 사찰ㆍ감시의 대상이 되고 징용ㆍ징병으로
많이 끌려갔다.
6개월
동안에 80%가 대대로 내려오던 자랑스럽게 보전하던 성씨를 일본어로 바꾸고 이름을 바꿀 때는 얼마나
다급함이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가 있다. 태평양전쟁으로 일본이 패망하지 않았다면 우리 민족이 얼마나 더
수모를 겪고 천민으로 살았어야 했을 가를 생각하면 아찔하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한다. 역사를 기억하고 와신상담하여 모든 면에서 일본에 우위를 치지하는 우리가 되자. 적어도 올 3ㆍ1절 기념식
행사장에 렉서스나 일제 고급차들이 주차장에 즐비한 꼴을 우리 구국선열들에게 보여주지 말았으면 하는 것이 내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