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문자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행복한
목사 부인
대학
선배인 C언니는 Y목사님과 결혼하여 50년을 넘게 산다. 목사의 사모로,
아내로, 며느리로, 그리고 어머니로 성공한 가장
행복한 여성이라는 평가에 후배들은 전혀 이견(異見)이 없다.
늘
웃음을 머금고 있는 귀여운 얼굴, 학교 성적도 우수하고 친절해서 많은 남학생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중학교 때부터 친하던 동네 오빠가 연인이 되었다는 사랑이야기가 솔솔 퍼졌다. 졸업을 하자마자 좋은 직장을 구했는데 곧 결혼하여 목회자의 아내가 되기로 했다고 한다.
미래가 막연하던 후배들은 직업도 있고 사랑도 있고 희망도 있으니 얼마나 좋을까 부러워했다. 그러나 한편, 우리는 선배의 결혼을 아까워했다. 계속 공부해서 교수나 여성 지도자가 되면 더 좋을 텐데 왜 가난한 목사의 아내가 되려는지…. 소곤소곤 속내를 나누었다.
흰
눈이 소복이 내린 어느 해 정초, 이목이 집중되던 그 결혼식이 떠오른다. 짧고 귀여운 하얀 정장 드레스에 날개 같은 면사포에 가려 생글거리던 어린 신부, 역시 행복한 웃음이 떠나지 않던 초록나무 같은 목사 신랑을 바라보며 우리들의 아쉬움은 눈 녹듯 사라졌다.
홍치마에 남색 두루마기를 입은 신부와 검정 두루마기의 신랑이 조촐한 피로연에서 춘향전의 <사랑가>를 부르며 좋아서 어쩔 줄 모르던 신랑각시가 닭살이라고
놀려주며 모두가 행복에 물들었던 얼굴이었지.
얼마 후 젊은 엄마가 첫 아기를 업고 비탈진 골목을 오르내리며
벽돌을 나르던 해맑은 얼굴은 잊을 수 없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확신으로 어려움을 마다않던 대학원
출신 사모의 남다른 선택과 충만한 삶은 우리에게 감동과 감사의 뜻을 새롭게 했다.
아, 물 흐르듯 흘러간 세월 속에 어느덧 선후배 따질 것 없이 모두 은퇴자의 길에 들어섰다. 인생의 결론을 말해주듯 각자의 삶에서 떼어낼 수 없는 족적(足跡)이 훈장처럼 버티고 있다.
두 분은 학창시절부터 그들이 꿈꾸던 모든
계획들이 한 치의 어긋남 없이 다 이루어졌음을 모두의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헌신적인 목사 사모로, 올곧게 자란 세 자녀의 어머니로, 한 남자의 사랑스러운 아내로, 정신을 놓아버린 시어머니의 봉양을 사랑으로 감내한 며느리로, 주어진
몫을 훌륭히 이뤄낸 자랑스러운 여인. 지금은 놀랍게 성장한 교회의 성도들로부터 원로목사와 큰 사모님으로
존경받고 있다.
참사랑의
집 안에서 양육된 세 자녀의 눈부신 성장은 말해 무엇 하리. 영광스러운 은퇴와 함께 안과 밖, 선명하게 드러난 만족스러운 마무리가 아름답다.
은퇴 후에도 새로운
도전을 시도하는 두 분의 역동적인 노년생활을 바라보며 요즘 세태에 드문 목회자 부부에게 신비감마저 든다. 평화로운
가정과 온유와 겸손으로 교인들의 영적성장에 온 정성을 다한 사역을 하나님께서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축복받은 두 분은 명쾌한 모델이다. 선배가 출간한 세 권의 책은 그들의 삶을 웅변한다.
<경쟁하지
않고 승리하는 삶>, <내 마음속에 부르는 이중주의 노래>
그리고 <화목의 뜰>. 성공한 교회의
과정 못지않게 따뜻한 가정의 이야기는 미리 경험한 천국의 모습이라 상상하기에 충분하다.
젊은 시절, 그토록 많은 공부를 하고도 전업주부의 역할을 선택했고, 문인으로, 칼럼니스트로, 자애로운 사모로 교인들을 보듬으며 어려운 이들을 남몰래
돕던 많은 선행을 일일이 밝힐 수 있으랴. 말씀을 삶으로 보여주는 부모님 밑에서 자란 자녀들이 어찌
믿음에 굳게 서지 않을 수 있겠는가.
노년에 더욱 빛을 발하는 그들의 사랑의 실천과 신실한 믿음, 소박하면서도 풍요로운 삶의 자세는 모든 이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이제
두 분의 그루터기에 끊임없이 피어나는 새싹들은 풍랑과 어둠이 판을 치는 이 세태에 우뚝 서서 자랄 것이라 믿는다.
그들에겐 두 분의 꿈과 후손들의 꿈이 이어지는 삶이 되고 그 꿈은 세상을 향한 희망의 빛이 되리라 믿는다.
그런데, 옥에도 티가 있다고 선배에게 어울리지 않는 건망증이 있었다. 그
사건은 꼬리처럼 따라다니며 우리를 웃게 만드는 일화다.
어느
성탄절에 사모님을 사랑하던 한 권사님이 고급 한복감을 선물했다. 어느 날, 목사님이 아무개 권사님이 주신 한복감으로 한복 했어요? 물으셨지. 아 참, 잊었네. 빨리
만들어 돌아오는 성탄에 입어야지. 며칠 후, 한복 찾아왔어요? 아 참, 한복 찾아야지. 그녀는
부지런히 옷을 찾아들고 버스를 탔다.
고맙게도 앞에 앉은 학생이 옷보따리를 받아 준다. 하하하, 버스가 멎자 어쩔거나. 까맣게
잊고 내렸지요. 덜렁덜렁 집에 왔지만 잊어버린 것까지 몰랐다 네요, 글쎄. 그날 저녁, 목사님은 기대에 찬 얼굴로 한복 한 번 입어 보구려. 네? 무슨 한복이요? 이쯤
되면 중증이 아닐런지. 우리들은 박장대소했다.
아, 착한 사모님의 말좀 들어보세요. 아무개 권사님껜 미안한데, 그 학생, 몹시 피곤한 얼굴이었어.
교복도 낡았고. 그 학생의 어머니에게 잘 맞았으면 좋겠어.
이 말을 할 때 약간 바보 천사 같았다. 그러나 눈치 없이 웃어대던 우리들은 갑자기 숙연해지고
말았다. 선배는 오로지 그 학생만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나는
그를 바라보다가 목이 메었고 눈물도 조금 나왔다. 아, 선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