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경(UW 한국학도서관 사서)
현장 예배를 보는 교회들에게 드리고 싶은 부탁
“문을 열고자 하면 닫힐 것이요, 닫고자 하면 열릴 것이다”
2주전 시애틀 지역에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사망 환자가 생기기 시작했다. 섬기던 교회에서는 주일 예배 외에 모든 예배를 전면 중지했다.
하필이면 사순절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자 마자 코로나사태가 벌어졌다. 기독교인들에게는
재의 수요일을 시작해 부활절까지 40일 동안 더 열심히 예배를 드리고, 성경을 읽고, 신앙과 믿음을 재점검해야 하는 때다.
이런 성스러운 기간에 모든 종교 활동에 올 스톱 브레이크가 걸린 것이다. 매일같이 새벽을 깨우던 새벽예배가 사라지고, 수요예배가 끊기고, 초원끼리 모여 가졌던 주일 성경공부와 초원모임이 모두 일순간에 정지되었다.
오직 주일날 드리는 1부와 2부 예배만 빼고 모든 교회 활동이 정지되는 사상 초유의 일이 일어난 것이다.
인터넷으로 주일 예배를 생방송하면서 실시간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조치도 취해졌다. 이러한 조치가 있은 후 지난 주 첫 현장 예배에는 성도들의 수가 반도 채 되지 못했다. 예배 후에 친교실에 모여 식사를 나누던 광경도 사라졌고, 따뜻한 커피 한 잔도 마실 수 없는 싸늘한 교회가 되어, 예배가 끝나면 모두 종종걸음으로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기 바빴다.
이게 모두 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감염 확산에 대한 염려로 철저한 예방 차원에서 어렵게 내린 결정이었다.
2주 째에 들어서자,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워싱턴 주를 비롯해 미국 전역에서는 비상사태가 선포되고, 다수가 모이는 집회를 모두 중단하라는 권고가 내려졌다. 250명 이상이 모이는 행사는 법적으로도 제재를 받게 되었다.
대형 교회인 경우에는 주일에만 드리던 예배마저 드리지 않고 문을 닫아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중소형 교회에도 주일 예배를 열 것이냐 말 것이냐를 두고 고민을 하는 모습이다. 앞으로 코로나 상황은 더욱 안 좋아질 예상이라 교회마다 결정이 쉽지 않아 보인다.
교회 내부에서 하나 둘 걱정하는 목소리도 들린다. 교인수의 3분의
1로 줄어든 텅 빈 예배당 자리를 보며 그렇지 않아도 좋지 않은 교회 재정에 타격이 생길 것은 불을 보듯 뻔하게 예측되기 때문이다.
저마다 교회에서는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 지 머리를 맞대고 의논 중이다. 인터넷에서 온라인 헌금을 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자는 안건에서부터, 헌금 봉투를 교인들의 집에 우편으로 붙여주자는 생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의견들이 개진된다. 그리고, 결국 교회의 문을 열기로 결정한다.
코로나
감염의 위기에도 정부의 권고에도 교회 문을 열기로 결정한 이유에는 첫째, 헌금에 대한 우려가 없지 않다. 둘째, 예배를 드리고 싶은 (건강한
또는 자신이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교회에서 예배를 봐야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셋째, 예배당 소독을 철저히 하고 있기에 방역에 있어서 별 문제가 없다는 판단에서다 (바이러스의 숙주인 사람, 즉 교인 전체를 봉쇄하지 않고 교회 건물만 소독한다고 바이러스 방역이 가능할까?).
넷째는 어차피 온라인 예배를 위해 목사님 이하 몇 명의 교인이 나와서 방송을 찍어야 하기에, 이미 교회 문을 열려 있으니 여기에 일부 교인들이 함께 참여해서 나쁠 것은 없다는 상황만 고려한 짧은 생각이다.
다섯째로, 어차피 많은 교인들은 인터넷으로 예배에 참석하고 있으니, 예배당에 작은 수가 와서 ‘사회적 거리’를
두고 앉아 예배를 드리는 것이기에 문제가 없다. 마지막으로, 이럴 때일수록 교회문을 더 활짝 열고, 예배와 기도에 힘쓰는 게 맞다고 강하게 믿는 교인들이 있기 때문이다.
틀리지
않는 생각이고 저마다 조금씩 이해가 가는 논리이긴 하다. 하지만, 교회가 문을 열어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훨씬 더 많다는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다.
첫째, 교회당 문을 닫지 않고 열어 둠으로써 세상에 수많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 뜻하는 바와는 다르게 ‘교회=헌금’ 이라는 잘못된 메시지를 전파하게 되기 때문이다.
솔직히 재정의 문제가 심각하긴 하다. 대부분의 이민교회가 한국처럼 온라인 헌금의 시스템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고, 한국처럼 자유롭게 송금하는 문화가 아니기 때문에 (아직도 대부분 개인 수표를 써서 헌금을 내는 실정), 교회 문을 닫는다는 것은 결국 헌금이 끊기고 교회 재정의 악화로 가는 직격탄이 되는 게 사실이다. 이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교회는 없다고 본다. 물론, 자기가 몸담고 있는 교회의 재정을 잘 관리해야 할 임무가 교인들에게 있다.
하지만, 지금은 교회 재정을 걱정하기보단 교인들의 건강과 생명을 우선 순위에 놓아야 할 때이다. 물질과 사람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하냐는 흑과 백의 분명한 상황이다. 영리를 추구하는 집단이라면 물질이라는 이득 앞에서 잠시 판단이 흔들릴 수 있겠으나, 잃은 양 한마리라도 소중히 여기고 그들의 영혼까지 케어하는 교회라는 곳은 절대 헷갈려서도 혼동해서도 안 될 명백한 사안이다.
흔히 세상에서 말하듯 돈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을 수 있지만, 사람 생명이야 한번 잃으면 다시 구할 수 없지 않은가?
아무리 기독교가 부활 신앙을 믿는다고 해도, 위험을 감수해서까지 교인의 건강과 생사가 될 수도 있는 문제를 안일하게 취급해서는 안된다고 본다.
지금은 교회가 헌금이 걷히고 안 걷히는 것을 염려할 때가 아니다. 돈을 걱정하려면, 교회 재정보다 교인들의 재정을 먼저 생각해야 진정한 교회가 아닐까? 교인 없이 교회가 존재할 수 없고, 교인들이 함께해야 교회라는 조직도 살아나는 것이다.
코로나로
이미 교인들의 사업장과 가정의 경제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어려운 때에 교회의 재정을 살리자고 힘든 교인들에게 물질적인 도움을 주지는 못할 망정, 손을 내미는 일은 적어도 지금 교회의 고민이 되어서는 안 된다.
지금은 교회의 건물의 융자를 갚느냐 못 갚느냐의 문제로 고민하기보단, 성도들이 각자의 삶터에서 집 융자를 밀리지 않고 잘 갚을 수 있는지, 사업장의 렌트비를 다음 달에도 잘 낼 수 있는지, 교인들의 가정에 감염이 될 위험군에 노출된 식구는 없는지, 자녀들의 건강은 괜찮은지 또 앞으로 장기 휴학에 들어간 아이들로 고민하는 부모님들의 상황은 어떤지, 그런 문제를 함께 고민해야 할 때이다.
교회의
목사도 장로도 일반 교인도 교회가 문을 여는 이유가 헌금에 있다고 생각하며, 여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이 비상 사태에 계속해서 교회 문을 열면 기독교인들을 향해 믿지 않는 사람들의 비난은 멈추진 않을 것이다.
오얏나무 밑에서 갓끈을 고쳐매지 말라는 말을 교회가 재고했으면 좋겠다. 어차피 직접 교회에 나와서 헌금 봉투를 내미는 교인들의 숫자는 극소수다. 이럴 때일 수록, 교회가 사회를 향해 건강한 메시지를 냈으면 좋겠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세상에 외쳤음 좋겠다. 교회 건물을 팔아야 한다면 팔리라는 마음으로 재정의 노예에서 자유로운 교회의 진면목을 보여줬으면 좋겠다. 그런 믿음이 왜 기독교 교회에서는 찾기 어려운지 모르겠다.
둘째로, 종교의 자유가 중요하고 개개인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예배당에 나와 주일 예배를 드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교인들이 더러 있다. 예배는 반드시 교회에 와서 드려야 한다는 강한 신념을 가졌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분들 중에 신실한 믿음을 가진 훌륭하신 분들이 많다. 그 훌륭한 분들에게 묻고 싶다. 왜 꼭 교회에 나와야만 예배를 드릴 수 있고, 성전에 앉아서 기도를 해야만 기도의 맛이 나는 것이냐고?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로 인해 아무도 코로나 바이러스의 감염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상태에서, 꼭 외부로 나와 집단으로 현장 예배를 드려야겠다고 주장하는 건 너무 안일한 판단이자 자기 중심적인 태도가 아닌지 묻고 싶다.
세상에 누구도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되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다. 다들 조심하고 어떻게 해서든 감염을 피해가고자 하루에도 열두번 손을 씻고, 불편한 마스크를 하루 종일 벗지 않은 채, 사람 많은 곳을 피해가며 사회적 거리를 두고 주의한다.
조심해도 재수 없게 바이러스에 노출될 수 있고, 감염된 바이러스를 나도 모르게 타인에게 전파시키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 그래서 온 세계가 이 지경까지 오게 된 것이다. 이 정도의 상황이면, 모두의 협력과 참여가 절실하다. 하루라도 빨리 바이러스 퇴치를 위해 함께 고통을 분담해야 할 때다.
그래서 어린아이들조차 학업을 중단시키고, 직장의 문을 닫고, 행사를 미루고, 가능한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최대의 노력을 기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수술을 앞둔 환자도 코로나 환자가 아닌 경우라면 의료진 확보를 위해 수술을 미룰 것을 강제적으로 종용하는 때다.
모두에게 불편을 주지만, 모두를 위한 길이기 때문에 사회의 구성원인 우리 모두가 따라야 할 책임이고 의무이다.
내게
편안하고 감동적인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교회의 문을 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내 믿음만이 중요하고 내 종교의식을 치르는 일만이 중요하다고 이기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
지금 좀 불편하고 덜 감동적인 예배를 본다 해도, 나로 인해 또는 타인으로 인해 한 명이라도 불행하게 감염될 수 있는 상황에 일조할 수 있다면, 거기에 우리의 노력을 기해야 한다.
시민 모두가 피해와 고통을 감수하면서도 공공의 선을 위해 누군가 다칠지 모를 그 한 명의 희생자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다함께 힘을 기울여야 한다.
그런
면에서 어느 단체보다도 내 이웃을 사랑하고 내 몸과 같이 아껴야 하는 기독교인들이 자중해서 모임을 취소하고, 사람이 모이는 현장 예배를 전면 중단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제발
나의 믿음만을 위해 타인의 귀한 건강과 심지어 생명을 위협하는 일에 무심하지 말자. 기독교인들이 이럴 때일수록 자진해서 이웃을 위해 자기 희생을 실천하자. 예배가 전처럼 맛나게 드려지지 않으면 좀 어떤가?
내 이웃의 건강이 덜 위협받는 다면 그게 한 생명을 살리는 길이 아니고 무엇인가? 더군다나 온 지역사회와 나라와 세계가 코로나 바이러스와의 길고 긴 전쟁에 돌입해 있는 지금 이 시점에서 말이다.
나는 지금 건강하니까, 설마 내 옆에 앉은 사람이 확진자일라고, 이정도 거리면 안전하겠지, 방역에 충실했다고 하니까 하면서 안일하게 생각하지 말자. 우리의 이웃인들 만큼이라도 기독교인들이 사회에서 제안하고 제시하는 일들에 참여하고, 협조하고 배려하자. 이 모든 고난을 절대자에게만 맡기지 말고, 오늘 내가 해야 할 기본 건강 수칙들을 지키자.
사회의 구성원으로써 내 거룩한 믿음이 타인에게 되려 해가 되고 있는 건 아닌지 점검해보자.
우리는
코로나 바이러스로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이웃집 할머니 할아버지를 잃었고, 질병과 싸우던 의료진들을 잃었고, 세계 곳곳에서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를 잃었다.
주가는 폭락했고, 경기는 곤두박질 치고, 인심도 잃고, 마음의 여유도 잃었다. 교제도 만남도 여행도 배움도 모두 순식간에 코로나로 잠식해 버렸다. 사람과 사람 간에 손을 맞잡고, 악수하고, 다독여주고, 서로 안아주던 스킨십 마저도 코로나 바이러스에 빼앗겼다.
이런
상실의 시대에, 기독교의 참된 정신마저 잃어버리는 실수는 저지르지 말자. 고통 분담의 시대에,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는 기독교인이 되자.
작은 것을 잡으려다 더 큰 것을 잃고 뒤늦게 후회하지 말자. 헌금 몇 푼을 더 걷기 위해 교회 문을 열어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지 않는 교회가 있다면, 그로 인해 교회에서 발길을 영원히 뗄 수도 있는 귀한 영혼을 벌써 많이 잃었다는 것을 기억하자.
우리의
편협한 생각으로 인해, 안일한 재정 걱정으로 인해, 나만 만족하면 좋은 예배를 드리기 위해,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는 씻을 수 없는 죄를 이미 짓고 있는 것은 아닌지 깊이 생각해보자.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모두가 코로나 바이러스로 힘들고 지친 이 때에 예배를 위해, 헌금을 위해, 교회 문을 꼭 열어야 한다고 말씀하진 않으실 것 같다.
예배를 못 본다 해도, 헌금을 못 내서 교회 건물을 설령 잃게 된다 해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정신을 잃지 않는다면, 우리는 진정한 기독교인이자 그의 참된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닐까?
우리의 믿음은 이런 면에서 더 담대해지고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이제는 안일한 예배당의 울타리를 넘어서, 삶의 현장에서 믿음을 실천하는 진정한 기독교인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