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진 목사(루터교 은퇴/미주 크리스천문인협회원)
예수 탄생의
본질적 의미
필자가 사는 동네에 ‘Five Mile Lake Park’란 이름의 공원이 있다.
연못을 끼고 하늘을 찌를 듯한 30m 높이의 전나무들이 울창할 뿐
아니라 양쪽 통로를 끼고 잣나무도 무성하게 들어찬 숲이 아름답다. 새로 단장한 테니스와 농구 코트까지
갖춘 공원인지라 산책을 즐기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다.
비가 안 오는 날이면 아내와 이 테니스 코트를 찾곤 한다. 늦가을이라 나뭇잎마다 단풍이 들어
바람에 밀린 잎들이 땅바닥에 뒹굴고 있던 어느 날 그곳을 찾았다.
밤나무에서 떨어진 밤들도 눈에 띄었다. 여남은 개의 밤알들을 주워 모아 집에 와서 까보았다. 얼마나 쓰든지 왜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당하는지, 아니 다람쥐들조차도
쳐다보지 않을 정도인지를 알게 됐다.
이유는 단 하나. 달콤해야 할 밤이 쓰기 때문인 것이다. 모양은
얼마나 실하고도 먹음직스러운지 모른다. ‘빛 좋은 개살구’란 말이 딱 어울린다. 단맛은 밤의 생명인데 이 맛이 없으니 천덕꾸러기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성경에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오.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어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태복음5:13)고 했다.
소금의 생명은 짠맛이고 이는 소금의 본질이기도 하다. 밤의 단맛이나 소금의 짠맛 같은 본질이
빠져버리면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유럽의 거창한 교회 건물들이 문을 닫아 서커스단의 연습장과 극장으로 바뀌어 버린 것이 좋은 예다. 현재
미국에서는 1년에 새로운 교회가 1,500개 정도 생겨나지만
문 닫는 교회가 4,000여개에 달하고 있다. 이런 추세가
이어진다면 50년 후에는 미국도 유럽과 같은 처지가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모든 본질적인 것은 보이지 않는 깊숙한 저변에 깔려 있다. 교회도 본질적 사명에서 어긋나지 않도록
현재의 현상(現象)에서 본래 제 모습으로 돌아가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필자가 사는 동네에 서있는 쓴 밤이 달린 나무와 달리 163년이나 묵었는데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밤나무가 퓨알럽에 있다. 밤알이 떨어지기 무섭게 사람들이 주워가기 때문에 부지런하지 않은 사람은
밤알을 구경조차 못한다. 밤 색깔이며 크기가 특별한 것이 없지만 본질적인 밤 맛이 달다는데 차이점이
있다. 밤의 생명을 잃지 않고 지니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겉만 보고 판단하지만, 하나님은 속을 더 중요시한다. 그러기에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하나님은 중심을 본다”(사무엘상 16:7)고 했다.
사도 바울도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이를 알지 못했다. 자기는 로마의 시민권을 가졌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자부하고만 있었다.(사도행전21:39)
하지만 주님과 만남에서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신임을 알게 돼(에베소서 2:1)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라”고 외쳤다.(로마서 7:24)
더욱이 이 사망의 몸에 묶여 있었던 자기가 죄(죽음)의
종에서 해방돼 어둠에서 빛(생명)으로 바뀌어 새 피조물이
되었음을 알게 된다. 신앙생활의 본질이 바로 이것이다. 예수의 나심을 ‘Merry
Christmas’라 부르는 이유도, 예수 탄생이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되는 것도 바로
‘어둠에서 빛으로’ 바뀌는 그 은혜 때문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