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춘 한국일보 시애틀지사 고문
시애틀의 브루스
시애틀 시내 관광명소는 뻔하다. 스페이스 니들과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이
고정 안내코스로 돼 있다. 하지만 얼마 전 LA의 아들 가족이
왔을 때는 나도 못 가본 곳들을 구경했다. 그 두 곳이 포함된 10개
지정명소에 찾아갈 때마다 핸드폰에 합격 신호음이 울리는 온라인 게임 덕분이었다. 프레몬트의 ‘우주 중심’
팻말도, 다운타운의 아이스크림 가게도 있었다.
말로만 들었던 이소룡(브루스 리) 묘도
처음 가봤다. 캐피털 힐의 레이크뷰 공원묘지로 다운타운에서 2마일
거리다. 짧고 굵게 33년을 살고 간 세기적 쿵푸 스타가
자기보다 5년 더 젊은 나이에 촬영장에서 권총오발로 요절한 배우 아들 브랜든과 나란히 묻혀 있다. 묘석 위 엔 무술가 아닌 철학도로서의 그의 면모를 웅변하듯 두터운 동판 책이 펼쳐져 있다.
이소룡은 인기절정이었던 1973년7월20일 홍콩에서 갑자기 죽었다. 유작이 된
‘사망유희’ 촬영일정을 제작자 및 주연 여배우와 의논하던 자리였다. 그의 인기를 시샘한 정통 무술인들이
암살했다는 음모론이나 여배우와 정사 중 복상사했다는 루머도 나돌았지만 ‘진통제 부작용에 따른 뇌부종’이 공식 사망원인이다. 그는 두 달전에도 같은 증세로 쓰러졌었다.
그의 사망 5년 뒤 1978년
개봉된 사망유희엔 꺽다리 농구선수 카림 압둘-자바가 나와 엉성한 폼으로 이소룡과 대결하다가 녹아웃 돼
웃긴다. 한국의 지한재(합기도 달인)도 나왔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이소룡은 15분만 출연한다. 5층탑 건물을 한층 한층 올라가며 적수들을 때려눕히는
장면을 죽기 전에 찍어놨었다. 나머지는 대역배우를 써 짜깁기 했다.
이소룡의 첫 헐리웃 작품인 ‘용쟁호투’도 그의 사망 6일후
개봉됐다. 워너 브로스가 합작한 이 영화는 그해 미국 내 톱 흥행기록을 세워 그의 헐리웃 입성을 보장했다. 가라테 챔피언 출신 액션스타인 척 노리스와 로마 콜로세움에서 명 대결을 벌인 ‘맹룡과강’ 등 다른 4개
히트작품은 홍콩의 골든 하베스트 영화사가 제작했다. 헐리웃 벽은 그에게도 높았다.
그는 영화 스타가 되기 전에 이미 무술인으로 일가를 이뤘다. 정통
쿵푸에 권투, 유도, 레슬링, 펜싱, 태권도, 바디빌딩
등을 접목한 ‘절권도’ 를 창시했다. 살인적 파괴력의 ‘1인치 펀치’도 개발했다. 한인 이준구 태권도 사범에게서 옆차기 기술을 습득했다. 압둘-자바 외에 스티브 맥퀸, 제임스 코번, 제임스 가너 등 쟁쟁한 헐리웃 스타들을 수련생으로 뒀다.
그런 그가 18년간 성장한 홍콩도,
모친의 ‘원정출산’으로 태어난 샌프란시스코도, 무술인 배우로 입신한 LA도 아닌 시애틀에 묻혔다. 그가 아메리칸 드림의 씨앗을 뿌린 텃밭이다. 홍콩에서 영국 아이들과 싸움을 일삼았던 불량소년 이소룡은 1959년
샌프란시스코로 조기유학 왔다. 그의 영어이름 브루스는 샌프란시스코 출생 병원의 간호사가 지어준 것이다.
그는 곧 시애틀로 옮겨 친지의 차이나타운 식당에서 웨이터로 일했다. 식당
위층 구석방에 기거하며 에디슨 기술학교(시애틀 커뮤니티 칼리지의 전신)에서
고교과정을 때운 후 워싱턴대학(UW)에 진학해 철학을 전공했다. 하지만
공부는 뒷전이었다. 영국 아이들을 제압하려고 배웠던 쿵푸를 혼자 연마했다. 차이나타운에 지하실 도장도 마련해 학비를 벌었다.
식당 웨이터, 신문배달 등 잡일을 끊고 쿵푸에만 매달려 도장을 UW 인근으로 확장 이전했다. UW 여학생 수련생 린다 에머리와 1964년 결혼했고 이듬해 장남 브랜든을 낳았다. 음양오행설 등 중국철학이
담긴 쿵푸 이론서도 틈틈이 썼다. 이윽고 그의 명성이 헐리웃에 알려져1966년 TV 액션물 ‘그린 호넷’에 조역으로 출연하면서 LA가 그의 둥지가 됐다.
이소룡이 UW 학생시절 3년을
포함해 시애틀에서 보낸 6년의 발자취를 보여주는 사진, 시, 편지, 유품 등 300여
점이 차이나타운의 윙루크 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브루스를 아시나요?’라는 타이틀이 붙은 이 전시회에 자녀와 함께 찾아가 우리와
똑같은 역경을 딛고 헐리웃 벽을 넘어 첫 아시안 주연배우로 우뚝 선 이민자 이소룡을 보여주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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