킴벌리 호건(타코마)
‘저는 자랑스럽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타코마에 살고 있는 킴벌리
호건이라고 합니다.
이번 문화의 달 글짓기 대회 공고를
본 후, 큰 마음을 먹고 제 이야기를 써보기로 결심했습니다.
아마 제 이름을 보고 의아하게 생각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누가 봐도 미국 이름인데 이렇게 한글로 글을 쓰고 있으니까요.
저는 미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습니다. 태어난 곳은 독일이고, 2살 때 미국에 처음 왔으며 이곳 워싱턴주로는 1991년에 와서
지금까지 살고 있습니다. 워싱턴주에 살기 전까지는 사실 한국어를
쓰기는커녕 한글을 읽지도 못했습니다.
1991년도 만 6살 때 타코마로 이사온 뒤 한글학교를
통해서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한국어를 배웠던 이유는 어머니께서
제가 꼭 한국어를 배우길 원하시기 보다는 당시, 새로 온 동네 친구들을 사귀기 위해서였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제가
한글학교를 다닌 지 몇 주가 되지 않았던 그 때 당시 어머니랑 함께 차를 타고 한인타운을 지나가다 제가 길가에 있던 간판을 읽었다고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한글을 읽는 것을
보시곤 놀래서 차를 세우고 무엇을 읽었냐고 저한테 물으셨고 제가 대답으로 다시 간판을 읽었습니다.
물론 그 나이 때 무슨 의미인지
전혀 몰랐었지만 어머니께서는 제가 그때 읽은 한국어는 바로 ‘부한식품’ 간판이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후로 어머니는 제가 언어의 소질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시곤 꾸준히 제게 한글과 한국어를 가르치셨던 기억이 납니다.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정체성에 대해
혼란이 많았습니다.
사실 누가 봐도 저는 혼혈이지만
아빠 핏줄을 따라서 미국인(흑인)들과 같이 어울리기에는 피부색이
너무 연하다고 생각했고 또한 집은 당시 한국 문화가 강했기 때문에 미국인 친구들과 놀기에는 어려웠습니다.
반면, 어머니를 따라 한인교회를 다니고 주변에 한국인이 많았음에도 한국인보다 까만 피부를 가졌기 때문에 한인들과도
어울리기는 힘들었습니다.
저는 제가 늘 내가 한국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7살 때 부모님이 이혼하신 후로 지금까지 어머니와 항상 함께 살아서 그런지 스스로에게
내가 누구냐고 물었을 때 저의 대답은 “나는 한국인”이라고
항상 스스로에게 대답했던 것 같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전까지 한 번도 한국에
가보지 못했지만 저는 한국인처럼 매일 한식을 먹었고 한국 드라마를 보고 한국인 연예인을 좋아하며 ‘한국인’처럼 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한국문화에 대해서
더 궁금해졌고 더욱 한국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스스로를 한국인이라고 생각하며 학교에서도
늘 한국인 친구들과 어울리고 영어가 힘든 한국인 친구들의 영어 공부를 도와주기도 했으며 가끔 학교 선생님들을 대신해 영어를 한국어로 통역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한국인 친구들은 많았지만, 저를 이해 못하시는 분들도 많았습니다.
가끔 그분들은 누가 봐도 제가 미국인인데
왜 한국 문화를 그렇게까지 좋아하는지 이해를 못하시는 분들도 계셨고, 교회 어른들도 저한테 직접 와서
“너가 미국인인데, 왜 한국 사람들이랑 노니”하시는 분들도 꽤 많았습니다.
당시 제게 힘이 되지는 못하고 그런
시선으로 보시는 분들 때문에 제게는 더 큰 상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말들은 저를 더 강하게
만들어서 제가 한글을 더욱 더 완벽하게 배우고 싶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고 그 이후로 제게 유학에 대한 꿈이 생겼습니다.
보통, 한국인들이 유학을 생각할 때에 미국이나, 캐나다, 유럽 같은 곳을 생각하시겠지만 저는 반대로 한국으로 유학을 가기 위해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그 꿈을 이루고자 2002년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처음으로 제 어머니의 모국인 한국을 방문했고 어머니 고향인 대구에서 지냈습니다. 한국을 방문하던 당시 경북대학교, 계명대학교, 그리고 대구카톨릭대학교를 방문했고 미국으로 돌아와서는
앞으로 어떻게 다시 한국으로 유학을 갈수 있을지 꿈꾸며 대학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대학생활을 시작하며 더욱 더 많은
한국인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고, 제가 파트타임으로 일했던 은행과, 가게에서
한국인 손님들을 도와 드리면서 한국어는 더욱 늘었습니다. 2006년도 제가 4년이 지나고 4년제로 편입을 한 후 당시 제가 다니는 학교에서 한국에
자매 학교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큰 마음을 먹고 유학을 가고 싶은데
어떻게 갈 수 있는지 담당자께 여쭤보니까, 우리 학교 학비를 내면서 학점을 한국에서 받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1년 넘게 돈을 모으고 준비를 하고 2년
뒤 드디어 서울에 있는 서강대학교를 가게 되었습니다. 사학공부를 하며 유학 생활을 보냈습니다. 비록 경제사정으로 6개월 밖에 있지 못했지만, 그 짧은 사이에 한국에 대해 참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습니다.
사학 공부를 하면서, 한국 근대사, 한국사는 물론 영화를 통해 한국 근대사, 한국 여성사를 배웠습니다. 이 많은 것들을 배우면서 느끼게 된 점은
한글만 알고 한국을 배우면 안된다는 것을 느끼고, 혼자서 한자 공부까지 시작했습니다.
사실 지금도 아직 많이 모르고 부족하지만, 그 때 한국에 대해 더 배울 수 있다는 사실로도 너무나 좋았습니다.
한국에서 공부하던 당시의 저에게는
이상할 만큼 제 정체성에 대해 혼란스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한글도 읽을 줄도 알고, 한국어를 알고 있어서 그러는지, 만나는 사람마다 편하게 대화할 수
있었고, 한글을 알기 때문에 궁금한 점들을 검색해 스스로 찾아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를 만나는 사람들도 단순히 저를
미국인도 한국인도 아닌 그냥 나, ‘킴벌리’라는 사람으로
대해줬습니다.
오히려 나의 피부색 때문에 더 힘들
것만 같았던 한국이 더 편했던 반면 이렇게 넓고, 다양한 문화를 가진 미국에서의 생활을 더 힘들어 했습니다.
솔직히 지금도 가끔 스스로에게 혼란이
오기는 하지만 저는 제가 자랑스럽습니다.
제가 영어와 한국어 둘 다 할 줄
알아서 이제 직장 생활에도 무척 도움이 되고 영어 못하시는 분들을 도와 드리면서 이렇게 살 수 있다는 것이 무척 보람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사시는 한인들에게 작은 바람이
있다면 비록 겉모습은 제 겉모습이 한국인 같지 않아도 함부로 저와 같은 혼혈들을 판단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제 주변에 저처럼 혼혈인 분들도
많고, 보기에는 한국인 같지 않지만, 한국말을 알아듣고 하시는
분들 많습니다.
한국인들에게는 우리와 같은 혼혈들이
미국인으로 보여서 우리가 못 알아 듣는 줄 알고 안 좋은 얘기를 할 때면 무척 마음이 아픕니다.
다시 한번 말씀 드리지만 저는 한국인인
동시에 미국인입니다.
어려운 바람이지만 좀 더 우리 이웃들이
따뜻한 마음으로 미리 판단하기보다 따뜻하게 대해주는 그런 사회와 지역을 바래봅니다.
제 이야기를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