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순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 지부 회원)
제주
월동무
퇴근길
전조등 앞으로 빗줄기는 쉴 새 없이 들이친다. 컵에 담긴 따끈한 국물을 후후 불어 마시고 싶다. 몸 속을 관통하는 시원한 국물맛, 이런 국물에 대한 갈증은 아프리카, 콜롬비아, 브라질 등등 적도의 태양을 듬뿍 받은 갖가지 커피로도
해결할 수 없다. 낮부터 오래 끓여 무가 녹아날 듯 우러난 어묵 국물을 파는 포장마차가 있다면 당장
달려가리라.
주말이
다가오면 한국마켓 광고지를 훑게 된다. 제주 월동무 입하! 내가
찾는 광고다. 항공편의 발달로 시애틀에서도 겨울마다 제주에서 온 무를 한 상자씩 사 먹는다. 올해도 이걸 먹지 않으면 겨울 내내 몸이 나를 후하게 대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마저 든다. 제주의 시원한 해풍과 풍족한 태양을 받으며 드넓게 펼쳐진 오름의 보슬보슬한 검은 흙이 품어 키워 한겨울에 수확한
무다. 광고를 보는 순간부터 가슴이 뛴다.
겨울
무가 산삼처럼 몸에 좋다, 배처럼 달고 시원한 맛이다, 해서
욕심을 내는 것은 아니다. 어렸을 때부터 겨울철에는 무를 워낙 많이 먹었다. 김장할 무렵, 아버지는 뒤란에 커다란 구덩이를 파고 무를 차곡차곡
쟁여 저장했다.
찬거리가 없을 때마다 어머니는 움을 덮은 이엉 속으로 살짝 손을 넣어 무를 꺼내 왔다. 채를 썰어 볶은 무나물을 만들거나, 참기름에 비벼 먹기 좋은 생채를
만드셨다. 무채를 넣어 갓 지은 무밥은 간장에만 비벼도 맛이 있었다.
손님상에는 갈치를 넣어 칼칼하게 만든 무조림이 올랐다. 봄이 가까워지면 움 속에 저장된
무는 샛노란 순을 화관처럼 달고 있었다.
마침내 20킬로짜리 싱싱한 제주 월동무를 한 상자 들여온 날, 상자가 무거운
줄도 모르고 번쩍 들어 부엌으로 옮겨 놓고 몸은 바빠진다. 깨끗한 초록과 하얀색이 반반인 때깔 좋은
무를 똑똑 썬다.
친한 미국 친구들에게도 나눠 주고 싶어 평소보다 서너 배 많은 깍두기를 담는다. 동치미도 담그고 도톰하게 썬 무와 배추를 어슷하게 섞어 섞박지도 만든다. 김치를
담는 동안 부엌에는 무, 멸치, 다시마와 양파를 넣어 끓이는
채수 냄새가 가득 찬다.
점심엔 잔치 국수, 저녁엔 어묵탕을
먹을 것이다. 또 식구들이 좋아하는 무조림을 듬뿍 만들 것이다. 몇
개는 썰어 말리고 몇 개는 남겨야 한다. 채소 칸에 넣어 두고, 겨울
동안 대구탕, 동태찌개, 북엇국에도 넣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맛있는 제주 월동무를 언제까지 먹을 수 있으려나. 요즘 걱정이 생겼다.
고향이 변하듯이, 제주 농부들도 콜라비나 브로콜리 등 새로운 외래 작물을 많이 심어 무
경작지가 해마다 줄어든다고 한다. 결국 제주 월동무가 시애틀의 한국마켓, 그리고 내 차례까지 오지 못할까 봐 은근 마음이 쓰인다. 나에게
한국산, 제주 월동무가 함의한 것은 무 그 이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