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진 목사(루터교 은퇴/미주
크리스천문인협회원)
먼 곳으로부터 온 좋은 기별
내 나이도 이제 팔순(八旬)에 접어들었으니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이 정말 아름다워야겠다는 생각이 절실하다.
그러기에
내 모습을 추스르는 나이가 되지 않았나 싶다. 추스른다는 것은 일을 잘 수습하여 다스린다는 뜻이다. 나를 잘 다스리려면 내 모습을 바로 파악하는 것이 가장 시급하다.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고 했다(이사야 64:8). 사도 바울도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다른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고 했다(로마서 9:21).
이것들은 우리가 다 창조주의 피조물임을 분명히
해주고 있다. ‘우리가 창조주의 피조물’임을 분명히 아는
것이 바로 우리 믿음 생활의 첫 단추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했다(히브리서11:6). 여기서 상은 곧 영생(永生)을 의미한다.
신의 존재를 믿는 사람은 많다. 모든 것이 다 신이라고 믿는 범신론(汎神論)자나 하나님은 섭리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고 믿는 이신론(理神論)자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과 나의
진정한 관계는 수평(水平)이 아니라 수직(垂直)관계로 하나님은 나의 목자이고 나는 그의 어린양이어야 한다. 목자와 양과의 관계는 물고기와 물과의 관계이고 두더지와 흙과의 관계와 마찬가지이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면 죽듯, 두더지도 흙을 떠나면 죽는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바늘과 실의 관계와 같다. 반드시 실이 바늘에
붙어 있어야만 한다. 만일 따로 떨어져 있으면 실이 실 구실을 못하고 바늘이 바늘 구실을 못하게 된다.
전깃줄도 마찬가지다. 전깃줄이 끊어져 있으면 빛을 밝힐 수가 없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생명의 근원이 되는 하나님과
내가 반드시 연결돼 있을 때 어두움에서 빛을 찾게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는 어두움에 거하지 않는다’고 했고(요한복음 12:46),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했다(요한복음 8:12).
성경에서 어두움은 항상 ‘죽음’(σκοτοςㆍ스코토스)을 의미하고 빛은 ‘생명’(ζωηㆍ조예)을 뜻한다. 잠언 25:25절에서
‘먼 곳으로부터 오는 좋은 기별은 목마른 자에게 냉수가 된다’고 말하는 것도 바로 이것을 뒷받침해준다.
‘기별’을 히브리어로 ‘쉐무아로바’라 하는데 ‘좋은 보물창고’를
뜻한다. 성경에서의 보화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보화는
드러나있는 것이 아니라 숨겨져 있기에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아는 사람만이 안다.
마태복음 13:44절에 남의 밭을 지나가다 그 밭에 파묻혀 있는
보화를 발견하고 집으로 돌아와 아예 자기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는 내용이 있다. 자기 밭에 보화가
묻혀 있던 것을 밭 주인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이 보화가 될까. 아기 예수가 탄생했을 때 동방
박사들이 예물로 드린 세가지 중 하나가 ‘황금’(χρυσοςㆍ크르소스)이었다. 그 금은 왕을 뜻하기에 저들은 그 비밀을 알고 금을 드린 것이다. 왕은
다스리는 분으로 우리의 죽음까지도 다스린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고 왔다’고 했고(요한복음 10:10), 다윗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다’고 했다(시편 36:9).
만남의 끝에는 어쩔 수 없이 헤어짐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누구를 탓하고 원망할 수 없기에 운명을 수용하며 그 운명에 충실히 따르는 것만이 내 자신을 달래는 유일한 위로의 방편이 될 것이다.
하지만 주께서 말씀하신다. ‘너희를 위로하는 자는 곧 나라’고(이사야 51:12).
이제는 아픔의 덫에 걸린 마음을 풀어내고 혼신의 힘을 다해 굳은 땅을 헤집고 나온 풀 싹처럼 ‘위로하시는 자는 하나님’이라는 굳센 믿음을 갖고 여생을 살아갔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