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선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고문)
2월, 그 몸짓
2월은
쉼표를 닮았다. 숨 돌릴 새도 없이 이어지는 문장 속에서 살짝 틈을 벌여놓는 점, 있는 듯 없는 듯 작은 체구이지만 제 몫을 놓지 않는 영특한 아이 같다.
1월과 3월의 꽉 찬 월력 사이에서 유독 애틋한 몸집인데 규칙적으로 윤년을 만드는 깜찍한 소행은 발칙하기까지 하다. 올 2월은 때마침 29일이다. 집 나간 형이 돌아온 듯, 한 달이 그득하다. 게다가 날짜 수가 마지막 줄의 마지막 칸까지 채우고 있어 으스대는 꼴이 마치 훈장이라도 달 기세다.
소로의
저서 『인디언의 속삭임』에 의하면 2월을 “강에 얼음이 풀리는 달”이라고 했다. 우리의 정서와 다르지 않다. 또한 “춤추는 달” 이라고도 했다. 기어이 자리를 내줘야 하는 자연의 순리와 봄을 시샘하는 겨울의 끝머리에서 펼쳐지는 바람의 나부댐을 느끼게 한다. 자연 속에서 영혼을 읽어낸 그들의 정서가 아름답다.
나는 2월에 태어났다. 음력으로는 정월이었고 말띠 새해가 며칠 지나지 않은
때였다. 더구나 그해는 백말 띠였다. 가스나(계집애)가 백말 띠에 초정월생이라니,
외할아버지는 당신의 위세를 이용해서 외손녀 생일을 그전 해인 뱀띠해의 섣달로 바꿔서 호적에 올렸다.
그러나 천기는 속일 수 없었는지 내 성향은 뱀띠보다 말띠였고, 더구나 늘어난 나이 한 살이
억울해서 말띠 생임을 동네방네 외고 다녔다.
딸 아이도 2월생이다. 물론 음력으론 정월 생이지만 나는 호적을 바꾸는 위세를
부리지는 않았다. 덕분에 음력으로 쇠는 내 생일과 양력으로 쇠는 딸아이의 생일이 겹치는 해가 있다. 그럴 때 남편이 제일 좋아한다. 줄어든 번거로움 아니겠는가. 우리는 그렇게 닮은꼴인양 허세를 떨지만 딸아이는 나처럼 굼뜨지 않다.
올
2월엔 입춘과 우수와 대보름이 함께 들어있다. 그 작은 몸집에
대보름이라니, 참 옹골차다. 대한이니 소한이니 추위가 맹위를
떨치던 때가 엊그제인데 그새 대동강 물을 녹이다니.
옛날 중국 사람들은 우수인 때부터 닷새간씩 세분해서
특징을 지어 놓았다고 한다. 첫 닷새 간은 얼음이 녹으니 수달이 물고기를 잡아 다 널어놓고, 중간 닷새 간은 기러기가 북쪽으로 떠나고, 그러는 새 봄이 완연해서
마지막 닷새 간은 초목에 싹이 튼다고 했다. 우리 조상들은 겨우내 틈새를 막은 문풍지를 걷어내고 창문을
열어 우수를 맞았다고 한다.
달포
전 동지에 비하면 낮 길이가 엄청 길어서 화창한 햇살에 바람마저 데워졌을 것 같다. 아닌 게 아니라
그 바람은 겨우내 집안을 채웠던 텁텁한 공기를 밀어내고 봄기운을 쏟아 부어줄 것 같은 유혹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꽃샘바람의 시샘을 구태여 막지 않는 걸 보면 2월은 겨울이면서 봄이고,
봄이면서도 겨울을 놓지 않는 이중의 얼굴을 하고 있다. 세상인심을 어찌 비껴갈까. 꽁지 빠진 겨울바람이라지만 내놓고 봄을 맞을 수는 없을 터, 2월의
몸집이 유독 작은 이유를 가늠할 수 있겠다.
2월이
실감났던 건 학창시절이었다. 학기말 고사가 끝난 뒤의 어수선한 틈새에서 비집고 나오던 일탈, 너댓새간의 봄방학도 한 몫을 했다. 아침마다 등굣길을 불안하게 하던
상급생 규율부장이 없는 교문 통과는 2월의 절정이었다.
직장생활을
할 때도 2월이 참 좋았다. 다음 달 월급날짜가 앞당겨져서다. 공짜로 번 돈이 섞인 것 같아 신바람이 났다. 특별히 횡재할 게
없어 딴엔 뜻밖의 횡재였다. 알고 보면 일찌감치 세상 욕심을 버린 2월의
마음 밭 아니겠는가. 살다 보면 잃는 일도 있지만 다 잃는 게 아니라는 걸 2월이 말하는 듯하다.
이때 쯤
이곳에서는 제초제를 사는 손길들이 바쁘다. 겨울 장맛비에 군데군데 뒤덮고 있는 이끼를 없애고 잡초들을
제거하기 위해서다. 겨울 언저리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가 정신이 퍼뜩 들어서 엉겁결에 나도 한 포대를
샀다.
올해는 잔디밭의 볼멘소리를 듣지 않아도 될 성싶다. 넋
놓고 지내던 2월, 세상을 허투루 살지 않는 그 작은 몸집에서
삶의 이치를 배운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2월이 되면 마음이 영 불편하다. 안 그래도
빠른 세월이 2월 탓인 듯해서다. 딱 이틀이 부족한 한 달인데
왜 이렇게 마음이 허둥댈까. 문풍지를 걷어내고 창문을 열었던 옛 어른들의 속내에 내 생각을 얹어본다.
손바닥만 한 창문이지만 세상으로 나가는 출구다. 정녕 계절에 대한
온전한 예의뿐이었을까. 스스로의 삶을 위로하고 희망을 꿈꾸는 일도 마음의 문을 통해서 일 테니 그 속내를
짐작만 할 뿐이다.
2월은
진정 세상을 숨고르기 하는 삶의 쉼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