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수 수필가(서북미문인협회 회원)
가을 시루 떡
교회에서 주일마다 떡을 먹는다. 성도가 생일을 맞이하거나 범사에 감사해서 내는 사랑의 떡을 온
성도가 예배 후에 함께 먹으며 친교를 한다. 이렇게 떡을 거저 대접받으니 나도 1년에 한번씩 생일날 떡값을 낸다. 또 감사할 일이 있으면 그때 그때
떡값을 내기도 한다.
주일마다 여러 종류의 떡을 먹어본다. 호박떡, 무떡, 찹쌀떡, 멥쌀떡. 팥떡, 송편, 쑥떡, 무지개떡
등 이름도 모를 여러 가지 떡을 먹어 본다.
오늘은 푸짐한 시루떡을 먹었다. 시루떡을 보니 이맘때 고향에서 가을 시루떡을 먹던 옛 생각이
났다.
고등학교 다니던 때로 생각된다. 우리 지방에는 1년 농사가 다 끝나 바심을 하고, 김장도 담고, 초가(草家)지붕에 이엉을 해 입힌 후 음력 10월 어느 길일(吉日)을 택해 햅쌀로 시루떡을 쪄놓고 한 해 추수에 감사하고, 집안이 편안하고 무탈(無頉 )하게 해준 보답으로 이 집의 수호신(守護神)에게 비(祈願)는 풍습이 있었다.
교회가 생기지 않았던 시절,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풍습인데 일종의 토속 기복신앙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집집마다 가을 시루떡을 넉넉하게 쪄 이웃과 친척들과 나눠 먹었다.
가을 시루떡을 찔 때에는 조심해야 하는 것도 많고 어려움도 많았다. 지금 같으면 방앗간에서 쌀을
빻아 오겠지만 그때는 그러지를 못하고 추운 날씨에 절구로 두말 이상의 쌀을 온 종일 찧었다. 머슴이
찧는 것을 도와주지만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대개 시루떡은 쌀 한 말을 기준하여 붉은 팥과 쌀을 다섯 켜 정도를 올린다. 켜를 올릴 때에는
짝을 맞추지 않고 홀수 층으로만 올린다. 맨 위층에는 청수(淸水)를 접시에 부어 올려놓는다. 이렇게 해야 떡이 설지 않는다고 한다. 이는 예부터 내려오는 떡을 잘 익게 하는 조상들의 노하우였다.
떡을 찔 때에는 부엌에 임신부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했다. 임신부는 사람의 몸에 또 하나의 생명체가
들어 있어 뱃속에서 ‘턱’을 이루기 때문에 임신부가 떡을 찌는 곳에 들어오면 떡도 ‘턱’이 생겨서 선다(익지
않는)고 믿어 왔다.
만일 임신부가 부엌에 들어와 부정이
타면 한 사발 분량의 떡은 반드시 선다고 한다. 이런 경우에는 임신부를 불러 한 부석(불을 지펴 때는 것) 불을 직접 때게 하고 절도 한번 시킨다. 임신부가 시루에 절을 하면 신기하게도 김이 오르지 않던 시루에서 김이 다시 오르면서 떡이 잘 익는다. 미신 같으나 신기한 일이었다.
화장실에 갔다 오거나, 남자가 들어오면 부정을 타 떡이 선다고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또 개(犬) 잡는 것을
보았거나 장사(葬事)집에 다녀온 사람도 부정을 타 떡이 선다고
부엌에 절대로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임신부가 떡에게 절을 하면 선 떡이 익는데 그 밖에 화장실에 다녀오거나 개잡는 것을 보았거나 장례식에 다녀와 부정 탄 경우 떡이 서는 경우는
아무리 절을 해도 다시 익지 않는다. 왜 그런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첨단 과학문명 시대에 부정 탄다는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긴 병원에서 첨단의료 장비를 수입해
들여올 때 돼지머리를 놓고 고사를 지내고, 아파트 이사할 때 길일을 찾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떡이 다 쪄지면 시루를 상에 받쳐 안방의 아래 묵에 놓고 할머니와 어머니는 청수 한 그릇을 올리고 손바닥을 비비며 머리와 윗몸을 연신 굽실거리고
중얼 중얼 무슨 소린지 모르게 작은 소리로 치성(致誠)을
드렸다.
손바닥만 안 비비면 영락없이 교회에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과 꼭 같았다. 또 수능 시험 보는 날 교문에 엿을 부쳐 놓고 수험생 어머니들이 시험치고 있는 자녀 쪽을 향해 시험 잘 치게
해달라고 손을 비비며 비는 모습과도 같았다.
할머니와 어머니가 치성을 드릴 때 중얼거리는 것은 오직 올해 풍년이 들어 추수를 잘하게 하고 집안이 평안하여 식구들 모두 앓지 않고 손자들
공부 잘해서 고맙다는 내용이고 또 돌아오는 새해에도 가정의 행복을 비는 정성어린 사랑의 기도였을 것이다.
시루떡은 큼직하게 썰어 접시에 담아 집안 곳곳에 놓아두었다. 그리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시루떡을
이웃집에 돌리는 것은 어린 우리들의 몫이었다.
세월이 흘러 이젠 그 시절의 할머니와 어머니들은 돌아가셨다. 뒤를 이은 주부들은 도시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가을이 돌아와도 먹음직한 시루떡을 찔 줄 모른다. 그저 방앗간에 가서 맞추면 된다.
시루떡 찌느라고 왁자지껄 떠들던 부엌에서 식구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맛있게 시루떡을 먹던 기억을 잊지 못한다. 그리고 할머니와 어머니의 정성이 깃들고 구수한 팥 향기 진동하던 두툼하고 투박한 시루떡을 그 후로는 먹고 싶어도
못 먹는다.
교회에서 먹는 시루떡은 얼른 보기에는 그 옛날 시루떡과 흡사하지만 맛은 그때 맛이 아니다. 할머니
어머니의 사랑과 정성이 들어 있지 않아서일까?
한 해를 감사하게 보내고, 돌아오는 소망의 신년에도 가정의 행복을 손을 비비며 열심히 빌던 할머니와
어머니의 소박한 모습이 눈에 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