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세진(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 지부 회원)
시간 정리
해를 마무리할 때마다 먼저 챙기는
일이 있다. 일년 동안 찍었던 사진들을 쭉 훑어보고, 올해
최고의 사진을 뽑는다. 내 눈은 영락없이 가족이 다 함께 찍은 사진에 머물고, 그 사진은 언제나 성탄 카드를 장식한다. 올해는 새 식구가 들어와
화면이 더욱 꽉 찼다. 지지고 볶았던 힘든 시간은 과감히 지우고, 행복한
추억만 골라 앨범에 가득 담는다.
어느덧 내 인생에 소중하게 자리
잡은 시간 정리의 습관이다. 물건도 버릴 짐과 간직할 것을 나누듯, 시간도
정리가 필요하단 걸 나이 들수록 절감한다. 식생활 다이어트가 몸을 가볍게 하듯, 시간이 정리되면 삶이 경쾌해진다는 사실을 이제야 좀 알겠다.
올초 일본의 정리 컨설턴트 곤도
마리에가 펴낸 책과 넷플릭스 시리즈는 미국에 정리 열풍을 일으켰다. 그녀의 독특한 정리법은 옷장뿐만
아니라 책장, 서랍, 사진첩 등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셀렘이란 기준이 적용된다.
두 손으로 그 물건을 만졌을 때 마음이 설레지 않으면 작별을 고하라는 조언이
내 가슴도 울렸다. 물건과도 마음을 나눌 수 있는지 없는지가 동행의 기준이 되는데, 수많은 기억을 담은 시간에는 과연 어떤 기준을 가지고 정리하고 있었던가.
돌아보면 올 한해도 참 많은 일이
있었다. 사건사고, 우여곡절, 다사다난, 파란만장 등 신문에서나 자주 보는 사자성어가 비단 남의
사정만을 일컫는 말은 아니었다. 강아지를 한 번도 키워보지 않은 우리 가족은 유기견을 입양하고 좌충우돌했다.
매일매일 터지는 황당한 에피소드에 울 수도 웃을 수도 없었다. 시애틀로
이사 온 지 10년이 훌쩍 지난 올해, 집안 여기저기가 고장
나 한숨 쉰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입시를 코앞에 둔 큰 아이의 예민한 감정에 온 가족은 살얼음판 위를
아슬아슬하게 걸었고, 영원히 귀염둥이 막내일 것 같던 아들에게도 사춘기가 찾아와 달라지는 모습을 아쉬워했다. 복잡했던 하루가 별탈 없이 마무리되는 밤이면 감사가 절로 터져 나왔던 해다.
수많은 기억이 수북이 쌓인 이맘때, 나는 조용히 쓰레기통을 가져온다. 오래 간직할 시간과 버려야 할
시간을 정리하기 위해서다.
아인슈타인은 일상에서 떠오른 수많은 아이디어를 적을 수 있는 만년필을 자신의
실험실로 여겼고, 그 중에 필요 없는 메모는 버릴 수 있는 휴지통을 최고의 과학 장비라고 소개했다.
그의 만년필과 쓰레기통을 내 생활에도 적용해 본다. 일기로 메모로, 사진과 기억으로 빽빽이 써 내려간 올 한해. 하늘이 무너질 것 같고
큰일 날 것 같았던 순간도 해를 마무리하는 지금은 별일 아닌 것 투성이다. 쓸데없는 걱정과 염려로 매였던
순간들을 휴지통에 버린다.
당장은 영글지 않았더라도 설렘으로 내일을 기대할 수 있는 시간은 소중히 간직한다. 옷더미처럼 높이 쌓인 기억들이 하나 둘씩 정돈된다. 잘 정리된 머리
속 여유는 다가올 새해에 무엇에 집중하고 어떤 것을 선택할지 결정할 생기를 준다.
한해 한해 추억을 정리해온 성탄
카드가 꽤 많이 쌓였다. 액자 속에 나란히 꼽으니 가족 일대기가 따로 없다. 아이들이 자랄수록 우리 부부는 늙어가는 변천사가 재미있으면서도 짠하다.
그
해의 포토제닉으로 선택한 사진 속 미소 뒤에 수많은 눈물과 땀이 숨겨진 걸 알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새해엔 또 어떤 사진을 남길까 행복하게 꿈꾼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송구영신에 자주 듣는 구절처럼 지나가야 할 것은 잘 떠나 보내고 새것을 기쁘게 맞고 싶다. 시간을 잘 정리하면서 반성과 자각이 있는 마무리와 설렘과 기대가 있는 첫머리를 지나 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