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근 목사(시애틀 빌립보장로교회 담임)
갇힌
자에게도 봄은 오는가?
“지금은
남의 땅-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중략)//입을 다문 하늘아 들아/내 맘에는 나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다오.”
이상화 시인은
1926년 일제에 빼앗겨버린 조국에서 봄을 노래했다. 정녕
봄은 왔건만 겨울도 한창 추운 겨울이다. 꿈에라도 상상하지 못했던 코로나바이러스로 전 세계가 온통 깊은
겨울 한파에서 벗어나지를 못한 채 저마다 집안에 갇혀 있다.
그래도
자연은 무심한 듯 흐드러지게 꽃이 피어 예년과 전혀 다를 바 없는 봄을 노래하고 있다. 아름다운 봄의
계절에 찾아오는 부활절 또한 어김없이 찾아왔다. 이로 미루어 볼 때 틀림없이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고
온 세상 사람들을 고통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는 코로나바이러스도 끝이 나게 될 것이다.
어차피
아파야 나을 병이라면 아픔을 불평할 것이 아니라 아픈 만큼 성숙할 줄 아는 지혜를 터득해야겠다.
서울
사랑의교회 옥한흠목사는 고통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하고 그것을 정리해 <고통에도 뜻이 있다>란 책을 내놓았다.
믿든 믿지 않든 인간은 다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단순한 피조물이 아니라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까지 내어주실 만큼 엄청 사랑하시는 자녀들이다. 능력이 한이 없으신 하나님께서 그렇게도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눈에도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로 망하게 하실까?
겨자씨만큼이라도 믿음이 있다면 그건 아닐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이 당하는 고통에는 무슨 뜻이 있을까? 고통만큼 성숙하고 단단해져서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라는
것이 이번 고통을 통해 우리들이 깨달아야 할 교훈이다.
어느
날 부턴가 시애틀에도 제주도와 같은 거센 바람이 수시로 불어오고 있다. 40여 년 전에는 비는 6개월 동안 쉬지 않고 내렸지만 바람은 거의 없었다. 비도 소리도
없는 보슬비였다. 홍수 같은 것은 없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
번개가 치고 소나기가 쏟아지며 홍수를 만들곤 했다. 거센 바람도 서슴없이 불어 닥쳤다. 30~40m 높이의 거대한 나무도 속절없이 넘어지곤 했다.
그런데
넘어진 나무 뿌리를 보면 참으로 한심하다. 뿌리가 몽땅 옆으로만 뻗어 있고 밑으로는 전혀 내려가지 않았다. 그러니 바람에 서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왜 시애틀 나무는 뿌리를
밑으로 내리지 않고 옆으로만 뻗었을까? 그 이유는 두 가지다. 바람이
없었고 물이 풍부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든지 만사형통하고 고통이 없으면 시애틀 나무 같이 위기에서
견디지를 못하고 쓰러지고 만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고 했다. 바이러스로 엄청난 고통을 당하고 있지만 이 고통을 통하여서 우리 모두 더 강하게
일어나야 하겠다. 잃은 만큼 얻기 마련이다. 이것이 창조주
하나님의 삶의 원칙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주는 것이 받는 것 보다 낫다”고 하시는 것이다. 고통은 정녕 싫지만 피할 수 없다면 기회로 삼아야 한다.
4월은
부활의 계절이다. 부활이란 ‘죽은 자가 다시 산다.’는 뜻이다. 과연 그럴까? 과연 사람이 죽어서 다 썩어 흙으로 돌아가 버렸는데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 어떻게 이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그래서
오늘 우리들에게는 믿음이 필요한 것이다.
태양이 동쪽에서 떠오를 것이라는 사실을 의심하는 자는 아무도
없다. 이것이 믿음이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냥 믿어지는
것은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사람이 죽었는데
어떻게 다시 살 수 있느냐? 따지기 전에 그냥 믿어져야 한다. 이것이
믿음이요 이것이 진리다.
사람이
죽어 흙으로 돌아가도 전능하신 하나님은 죽은 자와 똑 같은 사람으로 다시 살리실 수가 있다. 어차피
인간은 그와 같은 흙으로 빚어지지 않았던가? 이젠 좀 믿어야 하겠다.
인간이 별 볼일 없다는 사실을 오늘 우리는 뼈가 저리도록 경험하고 있지 않는가?
하지만
염려하지 말자! 하늘의 하나님께서, 죽은 자도 살리시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해결하실 것이다. 이것이 믿음이다. 오직 이 믿음만이
부활도 확신케 하고 이 위기도 끝날 줄 확신케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