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종덕 목사(벨뷰한인장로교회 담임)
치유의 신비
이사야 53:5-6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크고
작은 많은 병을 만납니다. 그 중에는 치료방법이 없어서 병 때문에 죽거나 낫더라도 장애를 남기고 마는
불치의 병도 있습니다.
병을 만나서 힘들 때는 우리의 신앙에도 깊은 굴곡이 찾아옵니다. 왜 나에게 이런 병이 찾아왔는가. 하나님은 왜 나에게 이런 병을
주셨는가. 내가 무엇을 잘못해서 이런 병이 찾아 왔나. 온갖
생각에 낙심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신자가 질병을 만나면 당연히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합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서 병든 몸과 마음을 요술방망이로 마술을 부리듯 모두 다 치료해주시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치유를 위한 기도에 효력과 응답이 언제나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질병과 치료의 경계에서 기도하고 있는 신자들의 갈등입니다.
성경에서의 치유는 두 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과 사도들과 함께 나타났던 ‘표적’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계시의 전달자가 하나님의 보내신 사람임을 증거할 때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초자연적인 사건’이며, 성경이 완성되면서 종료되었습니다.
둘째는 성령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죄를 사하실 때 일어나는 총체적인 치유와 회복입니다.
삶의 고통과 질병은 죄와 타락의
결과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때,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신자를 거룩하게 하시는 구원은 총체적이며 전인적입니다.
총체적이라 함은 우리의 영혼과 육체의 구원이
분리되지 않고 총체적인 구원임을 의미하며, 전인적이라 함은 우리의 지정의를 포함하는 전 인격적인 구원을
의미합니다. 이 전체적인 구원의 의미에 우리가 겪는 질병으로부터의 회복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중풍병자를 고치실 때
‘네 죄사함을 받았다’고 말씀하심으로 죄사함과 치유가 연결되어
있음을 보이셨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죄를 씻으실 때 삶의 고통과 질병으로부터의 치유 또한
이루어졌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새롭게 하셔서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묻습니다. 그런데 왜 아직도 삶의 애환이 존재하고, 질병의 고통은 떠나지 않고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삶의 과정성 때문입니다. 신자가
죽고 부활을 경험하기까지 우리는 ‘아직’ 완전함을 향한 과정에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성화가 이생에서는 불완전하다는 뜻입니다. 불완전하다
함은 구원이 불완전하다는 뜻이 아니라, 타락 이전의 사람이 영생으로 가는 과정이 있었듯, 거듭난 새사람은 부분적으로만 완전하고, 이생에서는 영적인 발전의
정도가 불완전한 상태로 남아 있다는 뜻입니다.
질병과 치유도 같은 이치입니다. 우리의 몸은 완전한 회복을 향한 불완전함 속에 있으므로 때로는 치료의 지연이 있고, 때로는 급속한 치료도 나타납니다. 이 단계에서 신자는 성령님과 함께
기도와 지성으로 협력하며 성화를 이루어 갑니다. 이것이 치유의 신비입니다.
이사야 53장 5,6절의 약속이 이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심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치유를 받았습니다. 그
치유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이미 이루셨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죄를 씻으시고 거룩하게 하셨을
때 ‘치료하시는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고치셨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믿는 것입니다. 실제로 믿는다는 것은 그것이 사실인 것처럼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 무엇이 사실인 것처럼 행동한다는 것은 그것이 사실인 것처럼 산다는 뜻입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할 것이며
주께서 저를 일으키신다고 하십니다.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크다’고 합니다. 죄사함과 함께 하나님의 치유는 이미 우리
안에 강하게 역사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믿으십시오. 그리고
‘믿음의 기도’를 하십시오.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신비가 결과로 나타날 것입니다(약5:1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