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칠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그릇
‘깜이 되느냐’라는 속된 말이 있다. 바로
그릇이 되느냐다. 다 갖춘 사람을 보고 그릇이 크다고 한다. 어릴
적 나는 큰 그릇이 되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사람의 능력이나 도량을 그릇에 견준 것이 재미있다.
살다 보니, 큰 그릇만큼 제 그릇에 맞는 역할을 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느꼈다.
음식도 어울리는 그릇에 담아야 으뜸
값어치를 낸다. 생선구이를 큰 대접에, 막걸리를 와인
잔에 담았다면 어떨까. 그릇 쓰임새가 따로 있듯이, 삶의 무대에서 우리도 제각기 다른 배역을
맡았다.
그릇을 영어로 컨테이너나 보올이라고
하지만 베슬(vessel)이라고도 한다. 그 베슬은 관(管) 또는 큰 선박을 뜻한다. 중요한
무엇인가를 담은 느낌이다. 조선공학을 전공한 내게 베슬은 남다른 울림을 준다.
나는 해군함정(navy vessel)을 건조하며 국방의무를 다했다. 방위산업 분야에서
군함을 오래도록 지었다. 배를 만든다는 대신 짓는다고 한다. 집도
짓고 농사나 밥을 짓는다고 표현하듯 옷과 글도 그렇다. ‘짓다’는
귀하게 여기는 대상을 서술하나 보다. 모든 배의 고유한 목적은 달라도 베슬에 실린 것들은 사람이나 물건이나 다 소중하다.
또 다른 귀중한 베슬, 우리
몸의 혈관(blood vessel)이다. 심장으로부터
신체 각 부분에 피를 공급하는 동맥과 되돌리는 정맥, 그리고 모세혈관이다. 생명과 직결되는 혈액을 배달하는 혈관, 그 베슬이 귀하게 느껴진다.
베슬은
성경에도 나온다. 바로 질그릇(earthen vessel)이다. 절대자가 인간을 질그릇으로 빚었다니, 너도 나도 그중 하나다. 우리는 사랑과 기쁨, 평화와 자비,
인내와 선, 절제와 온유, 충실 등 갖은 보화를
가득 담은 질그릇이다. 은총을 받고 태어났다. 그 중에 제각각
가장 크게 받은 보물이 있다. 그 보물을 갈고 닦아 다른 이와 나누어야 할 것 같다.
카톨릭
신자인 나는 성당에서 미사를 드린다. 성체를 담고 있는 그릇(sacred
vessel) 또한 아름다운 베슬이다. 성체를 모실 때마다 세상을 밝히는 작은 도구, 그런 질그릇이 되고 싶다고 기도한다.
훌륭한
도공(陶工)은 도자기를 구워낸 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미련 없이 깨뜨려 버린다. 보기에 괜찮은 작품임에도 도공의 결정은 매몰차다. 작은 흠일지라도
도공으로서 자존감이 용납하지 않은 것 같다. 완벽하게 구워 낸 작품은 가히 예술이다.
내가 찍은 사진이 마음에 차지 않을
때가 있다. 어렵게 잡은 순간이 아쉬워서일까. 아마추어이어서일까. 단호한 도공과 달리 나는 사진을 붙들고 갈등한다. 하기야 내가 만족하지
않은 작품을 다른 이가 감동할 리 있겠나. 나도 미흡한 사진들을 그냥 버린다. 남겨진 사진은 내 맘에 든다.
절대자가 질그릇을 만들 때 맘에
들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을까. 그의 마음에 들었기에 태어난 우리는 모두 작품이 아니겠는가. 순간 부듯해진다. 그렇다. 우리는 하나하나 절대자의 소중한 작품이다.
남에게 스스로 베풀어야만 편안한
이가 있다. 없는 듯 항상 뒤에 있는 이도 있다. 남을 딛고서라도 언제 어디서나 앞장서는 사람이 있다. 어떤 이는
세상을 평화로 보고, 어떤 이는 전쟁터로 여긴다. 원칙을
앞세워 바른 말을 하는 이가 있다면, 뒤에서 투사(投射)하는 이도 있다.
현재에 만족하는 자가 있고, 매번 새로운 것을 찾아 자신을 발전시키려는 이도 있다. 그릇 종류만큼
다양한 우리들이다.
저 높은 곳에 계신 도공의 깊은
뜻은 무엇일까. 독특한 그릇으로 빚어 준 그의 뜻을 헤아리는 일은 중요하다. 제각기 그릇에 맞는 자리에서 나 답게 살아가는 것, 누가 보아도 아름답다.
나는 과연 어떤 질그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