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구 수필가(전 외교관)
노르웨지안 쥬얼호를 타고서
아내와 함께 선덱(Sun Deck)에서 태평양을 바라보니 노을이 지고 있다. 뒤를 돌아보자 로스앤젤레스 항구가 어둠에 묻혀 간다. 우리 내외는
딸이 시켜주는 초호화 유람선 관광 길에 오른 것이다. 고객을 가득 실은 노르웨지안 쥬얼호(Norwegian Jewel)는 남쪽을 향해 달린다.
3일째 되는 날 아침, 5015호 선실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12층으로 올라가니 바다 멀리 기다란 멕시코 땅이 보인다. 우리는
빠른 걸음으로 선덱을 두 바퀴 돌았다.
팬츠만 입고 선베드에 누워 독서하거나 담소를 즐기는 승객이 많았다. 유람선인즉 총톤수가 9만3,502
톤이고 승객은 2,376명이란다.
레스토랑으로 갔더니 딸네가 아침을 먹고 있다. 커피와 빵을 들고 와서 손자들 옆에 앉았다. 가슴에 ‘Malay’라는 이름표를 단 웨이터가 다가오더니 “안녕하십니까?”라고 한국어로 반갑게 인사한다.
우리 관광객들은 텐더 보트를 타고 까보 산 루카스(Cabo San Lucas) 기항지에 상륙했다. 12월인데도 따뜻하다. 바닷가에서 펠리컨들이 우리를 맞이했다. 야자수가 다정히 서있는 해변 도로와 멕시코 풍물이 풍기는 전통 시장을 살펴봤다.
우리는 유람선의 탑사이더 레스토랑으로 돌아와 점심을 먹었다. 아내는 식탁에 앉아 한국수필가협회가
출판한 <한국수필>을 읽었다. 우리 내외가 애독한다. 저녁을 먹고 나자 아내와 딸네는 7층 스타더스트 씨어터로 향하고 나는 선실로 돌아왔다.
배낭을 열고 영국 패라곤 출판사가 펴낸 <세계사 백과사전>(Encyclopedia
of World History)을 꺼냈다. 세계적 권위를 자랑하는 231쪽의 <세계사 백과사전>을
통해 한국 위상과 한국인의 정체성을 파악하기 위해서다.
투탕카멘의 황금 데드 마스크(Tutankhamen’s gold death mask) 사진으로 표지를
꾸민 백과사전 8쪽에는 ‘역사란 무엇인가’(What is history?’란 질문과 ‘과거를 앎으로써 현재를 보다 균형 있게 관찰할 수 있다’라는 답변이 들어있었다.
먼저‘Korea(n)’을 찾으니 92쪽에 ‘China and Korea are controlled by
the Mongols’라는 말이
나온다. 210쪽에도
‘The Korean War.
North Korea, supported by China, invades South Korea, supported by the USA.’라는 구절이 있고, 224쪽에는 ‘After World War Ⅱ, Asia made a spectacular
economic recovery. Japan, Singapore, South Korea, Malaysia, and Taiwan all
became ‘tiger economies’with rising living standards and
modern factories’라고 씌어 있다.
한국이 ‘호랑이 경제국’의 하나로 등장한다. ‘Korea(n)’란 말이 들어 있는 글은 이것이 전부다.
다음 날 아침이 밝았다. 배를 탄 지 4일째다. 우리 가족은 마자트란(Mazatlan)에 내렸다.
관광객들을 따라 버스를 타고 멕시코인 가이드의 해설을 들으며 고풍스런 교회 건물, 재래 상가, 바닷가 풍경, 오팔
보석 상점을 구경했다.
저녁 무렵 유람선 13층 슈하스카리아에서
브라질식 불고기인 슈하스코를 먹었는데, 아내와 나는 내가 브라질 주재 한국대사관에 근무했을 때 맛보았던
터였다. 소금물을 바른 쇠고기를 쇠꼬챙이에 꿰어 구운 것인데 맛이 일품이었다.
그 다음 날 아침 마지막 기항지인 푸에르토 발라르타(Puerto Vallarta)에 도착했다. 배를 탄지 5일째 되는 날이다. 관광객
일동은 버스를 타고 야자수 해변가와 구시가지를 돌아본 뒤 산으로 올라가 멕시코의 명주인 테킬라(tequila)의
주조장을 견학하고 시음도 했다.
시애틀 근교 우리 집 뒤쪽 나무 숲에 걸려 있을 달을 떠올리며 유람선에서
밤하늘의 달을 쳐다본 뒤 선실로 돌아와 또다시 <세계사 백과사전>을
열고 특이하다고 생각하는 대목을 노트에 적었다. 37쪽에서 중국에는 BC
1500년 무렵부터 사물의 모양을 본 따 만든 그림 문자(picture symbols)가
있었으며 AD 200년 이후에 이 문자는 일정한 뜻을 나타내는 한문자로 변천했다고 말한다.
56쪽에는 로마 제국의 놀라운 팽창과 성공은 세계에서 가장 잘 훈련되고 장비가 가장 잘 갖추어진 군대 때문이었다고
설명한다. 100쪽에서는 일본 중세 장군들(shoguns)은
충성을 다하는 사무라이 무사들(samurai warriors)과 함께 몽골 차이나(Mongol China)의 공격을 막아냈다고 한다.
내가 수많은 영웅 호걸 이야기가 담겨 있는 <세계사 백과 사전>을 읽은 소감은 이렇다.
첫째로 책 내용이 매우 재미있다. 둘째로 책 줄거리는 ‘힘이 정의다(Might is right)’라고 설명하는 것 같다. 셋째로 집필진은 한글이 세계 최고의
문자임을 모르고 있으리라. 크게 서운함을 느낀다.
한글은 한국인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제일 요소이다. 이제는 한글이 세계사의 큰 부분을 차지하도록
해야 하겠다. 한국인의 정신 문화인 선비 정신도 세계사에 오르도록 힘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