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에스더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드디어
하늘이 보인다
갑자기
목이 따가웠다. 처음엔 이웃집에서 나무를 태우려니 했는데 타는 냄새가 여전하고 하늘마저 부옇게 변해
있었다. 설마, 여기까지?
더 이상 느긋하게 정원 일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들고 있던 전정가위를 내려놓고 서둘러
집안으로 들어와야 했다. 청정지역이라 여겼던 우리 동네까지 산불 연기가 밀어닥쳤다.
미
서부 지역이 사상 최악의 산불로 큰 고통을 겪고 있다. 인명과 재산 피해가 얼마나 큰지 통계조차 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란다.
캠핑을 갔다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어느 가족,
차 안에서 개를 껴안고 죽은 소년, 서로를 알아보지 못할 만큼 심한 화상을 입은 어느 부부의
이야기 등등 안타까운 소식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해마다 듣는 산불 소식이지만, 올해는 마음마저 산불에 갇힌 것 같다.
벌써
며칠째, 공기 청정기를 들고 이 방 저 방을 옮겨 다니며 애를 써보지만 답답한 일상을 어찌 해볼 도리가
없다. 시계를 들여다보지 않으면 때를 종잡을 수가 없다. 짙푸르던
나뭇잎들도 잿빛에 싸인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맑은
하늘을 보리라는 기상예보가 맞지 않는다고 누굴 탓할 수도 없다. 산불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 가는데,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 숨이 턱턱 막히는 광야의 한가운데
서 있는 느낌이다. 하늘을 향해 무릎을 꿇고 기우제를 올리던 옛사람들의 마음도 이러했을까.
아, 빗방울이다. 빗줄기가 차 유리에 닿는 순간 눈물이 왈칵 했다. 이토록 간절히 비를 기다려본 적이 있었던가. 비는 유리창에 선을
몇 개 긋더니 이내 잦아들고 말았다. 연기 층이 워낙 두터워서 비가 내려도 별 영향을 주지 못할 거라
하던데, 바람은 어디서 깊은 잠에 빠져 있는지. 바람아 불어라, 비야 내려라. 제발 이 땅을 말갛게 씻어다오.
별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밤, 하늘이 찢어질 듯 천둥이 울어대기 시작했다.
비를 몰고 오는 천상의 군대와 이를 저지하려는 세력이 공중에서 일전을 치르기라도 하듯 사나운 천둥소리가 계속 들렸다. 드디어 비, 비가 왔다. 지붕이라도
뚫을 듯 세찬 비였다. 한밤중에 내리는 빗소리는 세상의 어둠을 몰아내려고 진군해오는 하늘 군대의 북소리
같았다.
이튿날
아침 태양이 희미하게 얼굴을 드러냈다. 겨우 숨통이 트인 나뭇잎들도 고개를 가누기 시작했다. 몇 차례 비가 더 내리더니, 드디어 하늘이 파랗다. 바람이 흰 구름을 실어 나른다. 마침내 나무들이 초록 빛 긴 숨을
내쉰다. 꼭꼭 닫았던 창문을 열었다. 집안의 화초들도 한껏
이파리를 펼쳐 맑아진 세상을 반긴다.
푸른
하늘은 고개만 들면 언제라도 볼 수 있는 것이라 여겼다. 한 자리에 변함없이 서있는 짙푸른 상록수가
때론 지겹고 칙칙해 보이기도 했다. 그것이 엄청난 호사였다는 것을 손바닥만 한 천 조각에 호흡을 의지하고
나서야 알았다. 그늘 한 점 없는 사막 길을 걸어보고 나서야 초록빛 생명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지를
새삼 깨달았다.
만일
지금껏 마셨던 맑은 공기와 찬란한 햇빛, 땅을 촉촉하게 적시는 비를 돈으로 사야 하는 세상이 된다면, 햇살 한 줌 가격은 얼마나 될까. 맑은 공기 한 봉지와 비 한 방울의
값은. 어느 날 갑자기 모두가 산소통을 메고 다니며 숨을 쉬어야 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멀리
올림픽 산과 레이니어 산이 보인다. 연기에 갇혀 열흘 넘게 몸살을 앓았으련만 언제 그랬냐는 듯 깊고도
맑은 눈으로 세상을 둘러보고 있다. 산이 저토록 의연한 태도를 가질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제 품에서 자라는 나무들이 한결같이 하늘을 향하고 있어서일까. 눈이
시리도록 흰 눈으로 날마다 몸을 씻어서일까.
며칠째
비소식이다. 이 비로 모든 산불이 꺼지고 온 세상 맑아질 수 있기를,
혼탁한 세상에서 더럽혀진 마음들이 청정한 기운에 새로워질 수 있기를, 가슴마저 시커멓게
타버린 사람들 속에도 촉촉이 비가 내려 푸르른 생명이 다시 싹틀 수 있기를 소망한다.
드디어
하늘이 보인다. 가슴이 확 트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