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백 의학박사
‘설타나호’사고를 아시나요?
-세월호 참사 2주기를 앞두고
2014년 4월16일
침몰한 세월호는 대한민국 해운 역사상 사상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참사로 기억에 생생하다.
1912년 4월15일
발생한 타이타닉(Titanic)호 침몰사고는 세상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가장 널리 알려진 해상
조난사고이다.
그런데 1,517명이 목숨을 잃은 이 타이타닉호
보다 더 많은 희생자를 낸 미국 역사상 최악의 해양사고인 설타나(Sultana)호 사고를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설타나호 사고란 1865년 4월 27일 새벽 2시께 약 2,400명의
승객을 싣고 미시시피강을 올라가던 설타나호의 보일러가 폭발해 불이 나면서 떠내려가다 침몰해 약 1,800명이
목숨을 잃은 참사를 일컫는다.
이 같은 대참사가 왜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을까?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이날을 전후해 너무나 큰
사건이 연속적으로 터졌기 때문이다.
우선 같은 해 4월9일 남북전쟁 중 남부 북버지니아군
사령관인 로버리 E 리(Robert E. Lee) 장군이
북부군사령관인 율리시스 S 그랜트(Ulysses S. Grant) 장군에게
항복함으로써 4년이란 긴 세월에 걸친 전쟁이 사실상 끝났다.
닷새
후인 4월 14일엔 섬터 요새(Fort Sumter)에 반군기가 내려지고 성조기가 다시 올라가 축하의 종이 울렸으나 그날 밤 링컨 대통령이
존 윌크스 부스(John Wilkes Booth)의 총에 맞고 쓰러져 다음날 새벽 사망한 충격적인 사건이
터졌다.
11일 뒤인 4월26일에는
나머지 반군사령관인 조셉E. 존스턴 장군이 북부 월리엄 테쿰세 셔먼(William
Tecumseh Sherman) 장군에 항복했다는 소식에 전국, 최소한 북쪽 전역에서는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동시에 농가 곡식 창고에 숨어있던 링컨 대통령 암살범 부스가 연방군에 의해 사살되었다는 소식으로 전국이 흥분의 도가니에 빠져 있었다. 이런 연유로 바로 다음날 새벽에 일어난 설타나호 사건은 그늘에 묻히고 말았다.
때를 같이 해 각 신문들은 4월 21일 워싱턴D.C를 출발해 5월 2일
스프링필드 장지에 도착한 링컨 대통령의 장례 열차를 보도하기에 바빴다.
전쟁에 지친 국민들이 더 이상 전쟁 사망 소식을 듣고 싶지 않은 심리도 큰 작용을 했다고 할 수 있다.
타이타닉호 승객 대부분이 부유하고 유명한 명사들이었던 반면 설타나호 승객 대부분이 가난한 시골 출신 전쟁포로 귀환병이었다는 사실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 이유다. 이 같은 사실은 설타나호의 또 다른 비극인 셈이다.
이들은 최전선에서 싸우다 간신히 죽음을 면하고 포로가 되어 악명 높은 조지아주 앤더슨빌과 앨라바마주 카하바 포로수용소에서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리다 전쟁이 끝나 수 백 마일을 기차ㆍ배, 그리고 걸어서 ‘캠프
피스크’란 포로교환소에 도착했다 마침내 연방 관할지역인 미시시피주 빅스버그에 도착, 집에 데려다 줄 배를 학수고대했던 포로들이다.
정부는 당시 귀가비용으로 사병 1명당 5달러, 장교는 10달러를 지불하는 게 통례였다. 막대한 이익이 관계된 일이라 선주와 군부가 결탁, 실을 수 있는
배가 셋이나 있었는데도 2,400명이 넘는 승객을 설타나호에 몰아 싣고 떠났다.
이 배는 빅스버그에 도착하기 전 보일러에 금이 가 새 보일러로 교체해야 했으나 다른 배에 승객을 뺏기지 않으려는
선장 메이슨의 요구를 보일러공이 받아들여 임시 땜질만하고 빅스버그를 떠났다.
‘헬레나’라는 작은 동네에 멈췄다 떠났는데 이때 찍은 사진이 마지막 모습인데 배가 이미 기운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멤피스에 들렀다 석탄을 싣고 떠난 뒤 7마일 상류에서 보일러 4개중 3개가 터지면서 불이 났고,
불을 피해 강에 뛰어든 많은 사람이 익사하거나 저체온으로 희생됐다.
이후 3차례 조사가 진행됐지만 결과는 말단인 프레데릭 스피드 대위만이 유죄로 판정을 받았으나 이마저도 군 법무감에
의해 무죄로 뒤집혀 단 한 사람도 처벌을 받지 않았다.
과도하게 한 배에 몰아 싣게 만들었던 해치 중령은 그의 형인 정치인 오지아스 M 해치의 정치적
영향력에 의해 책임을 면했다. 오지아스 해치는 일리노이주 정무관이었을 당시 링컨을 대통령에 당선시킨
일등공신이었다.
이 같은 설타나호 사고를 되돌아보면서 세월호 참사와 유사한 점이 있지 않은가 싶다. 이 같은
사고나 사건이 날 때마다 부정부패는 물론이고 여야가 정치적 목적에 따라 사고 책임이나 진상을 규명하기 보다는 축소나 은폐에 급급한 것을 보게 된다.
이 같은 사회적ㆍ정치적 풍토가 있는데도 이를 방관한 국민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세월호 참가 2주기를 맞아 희생자들에게 다시 한번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