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칠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주고받고
‘산에
사는 메아리, 언제나 찾아가서 외쳐 부르면…’ 어린 시절 부르던 동요 메아리의 가사다.
70년대 팍팍했던 학창 시절, 친구들과 지리산 천왕봉에 올랐다. 야호, 목청껏 외쳤다. 아스라한
울림이 되돌아오면 내 가슴이 널찍하게 펴지는 듯했다. 뭔가 받았다는 뿌듯함이었을까.
온라인
시대에 메아리는 소중하다. 각종 게시물에는 덧글과 답글이 이어진다. 댓글이
달린 포스팅은 생동감을 준다. 인스타그램이나 카페, 블로그
등은 주거니 받거니 하는 글로 더욱 돋보인다.
본인에게
오는 글에 일일이 답한다는 작가 말이 생각난다. 보잘것없는 자신의 이름을 불러 주고, 시간을 들인 글이니 당연한 일이란다. 그는 건방지면 망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다. 그의 말에 공감한다. 답을 기다리는 메일에 깜깜소식이면
섭섭하다. 메시지를 받고 못 본 체하는 것을 속된 말로 씹는다고 한다.
누구나 씹든지 씹히든지 그 느낌은 별로다.
나도
만만치 않다. 답장을 미루다 시간을 놓칠 때가 있다. 그들도
나에게 서운했겠다. 미안한 마음에 굼뜬 몸을 탓한다. 맞다. 한쪽에서 소리하면 거기에 맞갋는 메아리를 보내 주어야 살맛 나는 세상이 된다.
미국에선
산에 올라 메아리를 들으려 외치는 사람은 없다. 자연 보호 차원이다.
소음에 동물들이 놀라 보금자리를 이탈하면 자연 번식에 지장을 가져온다. 일행이 많으면 12명 정도씩 알맞은 간격으로 산행한다. 산에서뿐 아니라, 미국인들은 사람 사이의 물리적 공간을 지킨다. 언뜻 차가운 듯싶지만
훈훈한 사람도 많다.
미국에서
처음 마주한 이웃 사촌 로버트는 따뜻했다. 우리 집 지붕 차양 구멍이 막혔다. 빗물이 차고 앞에 그대로 쏟아졌다. 그는 ‘내가 할게(I will~)’라며 높은 사다리에 올랐다. 비를 맞으며 배수로에
박힌 나뭇가지를 꺼냈다. 언제나 내 일을 제 일처럼 해 주었다.
우리집에서
이사 온 안동 하회탈이 로버트 집 거실에서 활짝 웃고 있다. 골프도 함께 치고 이런저런 우정을 주고받는다.
주면
받고 받으면 주는 게 인지상정이라지만, 요즘 준다고 받으면 큰일 난다.
코로나가 패악질한다. 손사래를 쳐도 막무가내다. 너나
할 것 없이 생각못한 일이었으니, 준비란 단어가 사치스럽다. 골든
타임을 놓쳐 지구촌 곳곳이 속수무책이다.
지난 2월,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는 태평양 너머에서 벌어지는 일이었다. 한국에서 마스크가 동났다고 했다. 나는 고국의 지인들에게 안부 묻는
일로 부지런을 떨었다. 시애틀은 아무 일 없다며 그들의 안위만 걱정했는데, 지금은 한국에서 나를 염려한다. 상황이 이리 뒤바뀌는데 딱 한 달도
걸리지 않았다.
한국에
있는 동기가 뉴욕 사는 친구에게 마스크를 한 보따리 보내왔다. 뉴욕 친구는 감염의 위험을 무릅쓰고, 북미 각주(州)에 사는
친구들에게 마스크를 우송했다. 서울에서 뉴욕, 시애틀로 먼
길 돌아온 마스크를 받고 보니 만감이 솟았다. 두 개만 남기고 남은 마스크를 이웃과 나누었다. 나누는 일이 개인만의 일일까.
워싱턴주의
결단도 대단하다. 시혹스 경기장에 들어섰던 야전병원과 군의관들이 시애틀을 떠난다. 워싱턴주보다 더 어렵고 힘든 곳으로 이전한다. 워싱턴주도 힘겨운
상황이지만, 다른 주를 위해 상생을 실천하는 나눔이 돋보인다.
집에
있으란다. 소리 없는 범인을 잡는 최상의 방법이다. 온라인
소통이 분주하다. 여러 도구로 화상 미팅을 한다. 서로 용기를
주며 부추긴다. 각자 집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화상 오케스트라 공연이 감명스럽다. 너도나도 사회적 거리 두기에 안간힘을 쏟는다.
내가 좋아하는 바다와 산, 그들도 찾아오는 이 없어 숨죽이고 있다. 이 모든 멈춤이 우리가 사는 지구촌을 더 낫게 만들어 주리라 믿는다. 아무 데나 가고, 아무나 만나고, 아무것이나 주고받아도 아무렇지도 않았던 세상이 그리워진다. 기다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