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순
수필가
새끼 샘
그 샘을
생각하면 참을 수 없는 갈증이 난다. 차가운 겨울엔 뽀얀 김을 내고,
여름엔 얼음처럼 찬 샘물. 노동으로 지친 아버지의 목을 시원하게 축여주고, 동네 아낙들이 어둠 속에서 깔깔거리며 등목을 하던 샘물. 그건 마을
사람들에게 마르지 않는 젖줄 같은 것이었다.
어린 나이였을
때는 그 샘이 너무나 신기했다. 더운 여름엔 샘물이 왜 그리 찰까? 또한, 왜 추운 날일수록 뽀얀 김을 내며, 오히려 따뜻할까? 이 샘이 무슨 요술이라도 부리고 있나? 샘의 깊은 아래에 용이 살고
있지는 않을까? 전설 같은 것도 생각했던 것 같다. 도시로
나오고 시간이 많이 흘렀다. 부모님께서 모두 돌아가신 후에는, 고향을
생각하면 이 샘물이 먼저 떠올랐다.
문고리가
손가락에 쩍쩍 들러붙는 차가운 아침이었다. 방문이 활짝 열렸다. 갑자기
들이닥친 한기에 새우처럼 몸을 구부리고 팔딱거려 보았지만 얼마 버티지 못했다. 이불을 걷어내고 방문을
활짝 열어 젖힌 이는 아버지였다.
“얼른 인나 샘에 가서 낯 싹싹 씻고 와라잉.”
아버지께
내몰려 이를 덜덜 떨며 샘에 갔다. 그 샘은 땅을 파서 만든 것이 아니었다. 언덕 아래 납작 엎드린 바위틈에서 물이 솟아 나왔다. 샘물이 머물다
흐르게 하는 석축은 말 그대로 우물 정(井) 자처럼 네모
반듯하게 쌓아졌고, 그 위에는 두 기둥이 정갈하게 함석지붕을 받치고 있었다. 샘에선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 때문에 추운 생각을 잠시
잊었다. 바가지로 하얗게 피어나는 김을 이리저리 건드려 보았다. 그리고
물을 퍼내 세수를 했다.
무더운
여름에는 들에서 일하다 점심 드시러 오신 아버지가 맨 먼저 찾는 것도 이 샘물이었다. 물을 길어 두어
집 건너 우리 집에 오는 사이, 누런 양은 주전자에는 아버지의 이마처럼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아버지는 물을 그릇에 따라 아주 달게, 그리고 오래도록 들이키셨다. 물그릇을 내려놓으며, 어! 시원허다, 추임새를 넣는 것도 늘 잊지 않으셨다.
여기까지는
어느 마을에나 있을 법한 샘이지만, 이 샘이 고향에 대한 기억의 앞자리에 자리 잡은 이유가 사실은 하나
더 있다.
이 샘에서
조금 떨어진 옹색한 곳에, 새끼 샘이 있었다. 아이 몸 하나
들어갈 정도의 작은 동굴 안에 졸졸 물방울이 떨어져 조그마한 물웅덩이를 만들었다. 새끼 샘이라고 한
것은 큰 샘이 옆에 있으니까 그렇게 부른 것 같았다. 새끼 샘은 평소에는 누구 하나 눈길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마을 누구네 집에서 홍역을 앓거나 안 좋은 일이 있을 때는 큰 샘을 사용하면 안 되었고, 그럴 때는 새끼 샘을 사용해야 한다는 촌락의 불문율이 있었다. 전염병이나
나쁜 기운이 이웃에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한 장치였을 것이다.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격리하는, 약간은 인정머리 없는 이유로 생겨난 이 샘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은 어느 해, 고향을 방문했을 때였다.
그 당시에
남편의 직장도 잘 풀리지 않고, 첫 아이를 낳은 지 얼마 안 되어 경제적으로도 한 치의 여유가 없었다. 초췌한 모습으로 고향을 찾았을 때, 우선 늙으신 어머니께 웃음을
안겨 드리지 못해 부끄러웠다. 그리고 이웃 사람들과 마주치는 것을 가능한 피하고 싶었다. 힘없이 고향집 골목을 돌아 나오는데 풀숲에 가려진 새끼 샘이 보였다.
그때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새끼 샘은 액운이 있는 사람을 격리시키는 역할만이 아니라, 힘든 일이 생겼을 때 사람들의 관심을 피하도록 배려한 것은 아니었을까?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슬픈 날이 있다. 상처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풀 수 있는 것도 있고 스스로 회복해야
하는 것도 있다. 아무도 모르게 펑펑 울고 싶은 날, 갈
수 있는 새끼 샘 같은 곳이 있다면 좋겠다.
실컷 울고 나서 동굴 안의 샘물에 가만히 얼굴을 비추어
보면 아픈 곳이 시나브로 치유될 것이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다시 큰 샘으로 가서 사람들과
어울려 왁자지껄한 즐거움을 함께 할 수 있을 것 같다.
고향의 샘물은 마을에 상수도가 들어오고 나서도 좋은 물맛 때문에 그대로 살아남았다. 이제는 근동에서 알려진 명물이 되었다. 마을 사람들 몇몇은 샘에
파이프를 꽂아 부엌으로 물을 끌어들이고, 가까운 도시 사람들은 큰 물통을 가져와 물을 담아 간다. 하지만 새끼 샘은 언제부턴가 없어져 버렸다.
마을 길을 넓히면서
개울물과 함께 시멘트로 포장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마음 한구석이 뭔가를 잃어버린 듯 허전했다. 새끼 샘은 아직도
아픈 사람들이 자기를 찾아주길 기다리며 깜깜한 길 밑에서 흐르고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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