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숙
수필가(서북미문인협회 회원)
날마다
기쁜 날
달력의
마지막 장인 12월이다. 한 해의 끝부분에 찾아오는 우울을
피해갈 수 없는 숙명적인 달이다. 해가 갈수록 외로움을 느끼는 것, 유독
나만 그런지 궁금하다.
우울증 때문에 외로운 것인지 외로우므로 우울한 것인지 잘 모르겠다. 새순 치는 나무처럼 매년 하늘을 향해 뻗어야 했는데 그러던 어느 날 아래를 내려다보는 눈길은 어지럽기만 하다.
지나온 세월이 아쉽고, 돌아갈 수 없는 아픔이 마음에 겹겹이 쌓인다. 그렇다고 외로움이 몹시 나쁜 것만은 아니다. 외로움을 통하여 인격적
성장을 이루기도 하고 결과물로 좋은 열매를 따기도 하니까 외로움을 잘 다스려 내 삶에 약이 되게 하는 것이 12월의
과제다.
비, 바람을 견뎌내고 튼튼히 선 한 그루 나무처럼 오늘이란 땅 위에 선 사람도 어쩔 수 없이 슬픔을 견뎌내야 조금씩
철이 드나 보다.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을 경험하고 터무니없는 오해도 받고 자신의 모습에 실망도 하면서
어둠의 시간을 보낸 후에야 가볍지 않은 웃음을 웃을 수 있고 다른 이를 이해하는 일도 좀 더 깊이 있게 할 수 있나 보다. 우리의 삶은 경이로움의 연속이다.
삶의 주위에 있는 갖가지 것들을
정직한 마음으로 돌아본다면 늘 새로운 것들로 인하여 우리의 삶이 풍성해질 것이다. 어려움을 겪었거나
이겨낸 사람은 나름대로 독특한 아름다움이 있다. 풍성한 그늘을 만드는 잎 너른 여름 나무처럼 누구나
가서 기대고 싶어지는 넉넉한 그런 품 넓은 사람으로 되기까지 슬픔이나 아픔의 용광로를 거쳐 정제된 인품은 보석처럼 빛나지 않는가!
날마다
살아가는 일상이 감격스러운 일로 가득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어쩌면 그것은 허욕이며 영원한 자기만족을
위한 행복 추구일지 모르지만 그런 생각을 하며 사는 요즈음이다. 그래서 순간순간 나름대로 마음을 훈련해
보기로 한 것이 감격하기다.
강철처럼 튼튼했던 사람들이 힘없이 누워버리고 마는 것을 경험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마음이 울적해져서 한동안 마음이 어지러워 이리 저리 흔들렸다.
하지만, 살아 있기에 부딪히는 크고 작은 일들, 걱정과 근심 그리고 불안으로
지새우는 많은 밤들이 우리를 지치게 하고 슬프게 하지만, 살아 있다는 그것만 생각하면 감격이다.
작은 것에 우리는 때때로 목숨을 걸기도 한다.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가! 허망한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살아있는
순간순간이 진실로 감격스러운 경이요 축복임을 느끼며 사는 한 해가 되기를 꿈꾼다.
선물로
주어진 순간순간을 그때그때 생생하게 향락할 줄 아는 능력이야말로 최고 위대한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방인의
저자 까뮈는 복숭아 과육을 깨물면서도 자신의 피가 쿵쿵 울리며 귀에까지 올라오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강렬한
과즙이 입술을 따라 흘러내리는 것을 미칠듯한 감동으로 느꼈다는 그의 고백, 온몸으로 살았던 그의 삶이
부럽다.
늘 다니는
길모퉁이에 허름한 아파트가 있다. 페인트가 다 벗겨지고 비가 오면 샐 것 같이 누추한 낡은 아파트다. 오래 전 그곳을 지나치다가 내 입에서 아! 하는 기쁨의 탄성이 흘러나왔다.
좋은 일이 도통 일어날 것 같지 않은, 그 음침한 아파트 한쪽에
아파트 입구를 화분과 꽃으로 장식한 예쁜 뜰을 보았기 때문이다.
아파트 현관 맨 위쪽에는 페인트가 벗겨져
얼룩덜룩해 보이는 골동품 세발자전거를 대롱대롱 매달아 컨트리풍의 멋을 낸 후 갖가지 모양의 화분에 예쁜 화초를 심어서 현관 주위에 배치한 솜씨도
보통이 아니었다.
현관 바로 왼편 쪽 작은 빈터에 분홍과 흰색의 코스모스를 무더기로 섞어 심은 것이
흐드러지게 피어 부드러운 바람에 살랑이고 있었는데, 아!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곳을 지나는 것이 즐겁고 기뻤다.
그 안에
사는 이가 누구며,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는지 궁금하다. 인생의
소란함과 혼란스러움 속에서도 영혼을 평화롭게 유지하는 사람일까? 아니면 날마다 다른 사람과 무엇인가를
나누면서 열심히 사는 이일까? 그는 자기의 부지런한 손길 덕분에 행복해하는 나 같은 사람이 있는 것을
짐작이나 할까? 지금까지도 나는 그 뜰의 주인을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뜰을 바라보며 미소 지을 때마다 그와 가까워지는 느낌이 든다. 그는 분명히 가난하지만 진정한 부유를
누리며 사는, 누구나 반할 만큼 매력적인 사람임이 분명하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지만, 그는 진정 나의 귀한 삶의 인연들이 아니던가? 그는
누구보다 주어진 순간순간을 즐기면서 타인과 나누는 것도 잊지 않고 사는 참으로 부러운 사람이다.
사람
속에 묻혀 살면서 사람이 목마른 이 팍팍한 세상에서 사람에게는 사람만이 유일한 희망이라는 걸 깨우치게 해 준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그에게 박수를
보내며, 나도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서 있는 그곳이 이 땅의 끝이라고 생각하면서 온 마음을 다하여
관심을 두고, 사랑하고, 감격하면서 또 무언가를 서로 나누며
살 수 있기를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