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준 장로(칼럼니스트)
빈손으로 받은
‘만나’
황해도가 고향인 우리 가족은 1ㆍ4후퇴 때 서해상에
있는 대청도로 피란해있던 중 정부의 난민 소개방침에 따라 미군 LST를 타고 목포로 이송되었습니다.
그때 동승한 1,000여명의 난민들은 또 다시 영암군, 해남군, 무안군 등지로 배정되었는데, 우리 가족을 포함한 200여명은 목포에서 배로 4시간이상 가야 하는 진도 섬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 해(1951년) 12월말 경, 우리가 탄 화물선은 황혼이 깃든 어둠을 헤치며 진도로 향해 떠났습니다. 선장실
외에는 전부 노천인 그 배에 무거운 짐부터 먼저 배 밑에 실은 뒤 그 위에 보따리를 든 난민들이 가득히 올라 탔습니다.
하늘을 지붕삼고 캄캄한 바다 위에서 그 추운 겨울 바람을 온 몸으로 받으면서 이름 모를 섬들을 구비구비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목포항을 떠날 때부터 조금씩 불기 시작하던 바람이 차츰 강도가 심해지더니 마침내 강풍으로 변하고 있었습니다. 뱃전에 부딪치는 파도의 물줄기를 흠뻑 뒤집어쓰면서 그 매서운 추위를 이겨내느라 모두가 새우처럼 구부린 채 꼼짝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태로 약 두어 시간이 지난 때였습니다.
갑자기 선체가 심하게 요동치는 듯 하더니 “쿵!” 소리와 함께 배가 멈춰 섰습니다. 암초에 좌초된 것입니다. 엔진 소리는 계속 들렸지만 배는 조금도
전진하지 못한 채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쿵! 쿵! 소리와 함께 부셔지는 파도의 물줄기가 난민들 위로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렸습니다. 우리 모두는 극도의 공포와 추위로 구원을 외칠 기력마저 잃고 있었습니다. 죽음은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금방이라도 배 밑으로 물이 스며들기만 하면 모든 것이 끝장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배 밑이 뚫리지 않은 것은 참으로 기적이었습니다. 마침내
최후의 수단이 강구되었습니다. 사람을 제외한 일체의 짐(피란
보따리)들을 전부 바다에 내던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닥치는 대로 짐들을 바다로 내던지는 청년들과, 한사코 버릴 수 없다면서 보따리를 부둥켜안고 울어대는 부녀들과, 추위와
뱃멀미를 못이긴 어린이들의 울음소리로 배 안은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부녀들이 그들의 보따리를
사수(?)하려는 그 보따리에는 분명히 그들만이 알고 있는 생명과도 같은 귀중한 알맹이가 들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들이 아무리 소중하다고 해도 생명과는 바꿀 수가 없었습니다. 네 것 내 것 할 것 없이 그 금싸라기 같은 짐짝들이 무수히 남해 한 가운데로 던져지고 말았습니다.
배의 짐이 거의 다 비워질 때쯤이었습니다. 거센 파도와 함께 선체가 크게 요동하는 듯 하더니
먼산이 약간 움직이는 것 같았습니다. 드디어 배가 앞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일제히 환호를 외쳤습니다. 우리는 살아난 것입니다. 비록 남은 것은 몸둥이 뿐이었지만.
사람들은 흔히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상태를 ‘빈 손으로’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의 우리 처지는 조금도 과장 없이 그야말로 빈 손으로 진도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그 빈 손으로 우리는 제2의 생을 시작해야 했습니다. 그 제2의 출발은 참으로 눈물겨운 가시밭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체험이 지금에는 천만금을 준다 해도 바꾸고 싶지 않은 너무나 소중한 내 생의 자산으로 남아 있습니다.
빈 손으로 들어간 진도에서 우리는 UN에서 공급해준 약간의 구호미와 그 식량 못지 않게 중요한
거처할 숙소와 일체의 부식과 모든 생활용품들을 생면부지(生面不知)인
고마운 진도 주민들이 아낌없이 베풀어준 도움으로 살았습니다.
아무런 보답도 기대할 수 없었던 우리에게, 혈연 관계도, 지연
관계도, 학연 관계도 아닌 우리들에게 오직 순수한 동족애의 발로로 베풀어준 그 분들의 은덕이 눈물겹도록
고마웠습니다.
그때 그분들에게서 받은 평생 잊을 수 없는 그 온정을 나는 하나님께서 그분들의 손길을 통해 우리에게 내려주신 ‘하늘의 만나’였다고 믿고 있습니다. 만나는 3,500년전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내려진 것이 아니라 그 후에도 계속 우리 인류 위에 내려주셨고 또한 앞으로도 영원히 내려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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