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근 목사(시애틀 빌립보장로교회 담임)
삶과 여유
러시아에 이반 파블로프라는 유명한 의학자가 있었다. 소화 분비물에 관한 연구로 노벨상을 받은
인물이다. 한창 연구에 몰두하고 있을 때 그는 병원균에 감염돼 사경을 헤매고 있었지만 어떤 약도 효험이
없었다. 그냥 침상에 누워 고열로 죽어 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조수를 불러 간신히 부탁 하나를 했다. 집 부근에 있는 강가에 가서 흙을 한
대야 떠달라는 것이었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부탁이었지만 조수는 병든 스승을 위해 그대로 순종했다. 강가에 나가 햇빛에 따끈해진 흙을 대야에 가득 담아 스승에게로 가져갔다. 흙을
본 파블로프는 고열로 몸을 잘 가누지도 못하면서 진흙에 손을 담그고 장난을 시작했다.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나자 파블로프의 열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주위 사람들은 이 같은 파블로프의 치유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진흙 속에는 전혀 약 성분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파블로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는 어릴
때 어머니와 함께 늘 강가에 나가 놀았다. 어머니께서 강가에서 빨래를 하며 재미있는 이야기도 해 주었고
그는 거기에서 진흙을 가지고 재미있게 장난을 치곤 했다.
이 같은 기억은 그에게 다시없는 평안을 가져다
주는 추억이었다. 그는 가장 평안을 주었던 추억을 되살리며 마음의 평정을 되찾는 것이 질병에서 해방될
수 있는 방안이 될 수 있다고 확신했고 그게 실현됐던 것이다.
어찌 보면 삶의 여유는 질병도 퇴치할 수 있는 이 시대의 신비다. 불행하게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여유가 없다. 한국에 나가 느끼는 미국과 전혀 다른 차이점 하나는 너무나도 바쁘고 분주하다는
것이다. 지하철을 타기 위해 낯선 지하도를 두리번거리며 걸어가노라면 전쟁이라도 난 듯 거의 모든 시민들이
뛰다시피 걸어가고 있다.
이제는 서울서 부산이나 광주 등까지 고속철 시대가 열려 순식간에 주파하게 되었으니 문자 그대로 여유를 뛰어넘어 ‘고속의 시대’를 살고 있다. 고속철을 타본 승객들의 의견은 엇갈리지만 “도무지
지방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여유가 없어 좋지 않았다”는 반응이 많다. 시속 300km의 고속은 주변 풍경을 감상할 여유조차 주지 않기 때문이다.
너무나도 바쁘고 분주한 삶 속에서 정상적인 인간관계도 형성되지 못한다. “남산으로 올라가면서
만나 남산 정상에서 결혼하고 내려오면서 이혼했다”는 말이 더 이상 코미디 소재가 아니다. “지금은 바쁘니 다음에 이야기하자”는 말이 이제는 통상어가 됐다.
대화가
단절된 부부, 대화가 끊어진 부모 자식, 대화가 없는 직장의
분위기를 상상해 본다면 인간의 삶이 이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쉽게 유추해 낼 수 있다. 저마다 마음 한
구석에서는 불만과 원망이 도사리고 앉았고 그로 인해 결국은 육신도 병들고 마는 것이다.
여유, 이것보다 더 귀한 약은 없다. “1분 빨리 가려다 평생을 먼저 간다”는 말은 고속 도로변에만 붙어 있는 사인이 아니다. 참으로 ‘인생 경고등’임에
틀림없다. 시원한 바닷가에서 수없이 밀려오는 파도를 바라보며 ‘나는
지금 어디로 밀려가고 있는가’생각해 보고 산 위에 올라 다른 산봉우리를 바라보며 ‘지금 내가 넘어야 할 정상은 무엇인가’도 생각해 보는 여유가 그립다.
미국으로 이민 온 많은 사람들의 한결 같은 이야기는 일주일에 하루를 더 쉬는데도 한국에서 주 6일
근무할 때보다 더 바쁘다는 것이다. 삶의 여유는 결코 물리적인 수나 시간이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가치와 마음이 만들어 내는 값진 유산이다.
낙천적인 성격의 소유자가 더 건강하고 일도 장기적으로 생산적인 역사를 만들어 낸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고 있는 것이다. 교회에 나가지 않는 사람들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보다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을 자신을 위해 투자할 수 있을까
생각해본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보다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고 더 성공하거나 장수하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삶의 여유를 갖고 인생의 의미를 깨닫고, 세상을 즐길 줄
아는 멋을 지녀야 한다. 낭만은 결코 시인들의 전유물이 아니다.